누적기준 적용으로 해외 생산 애로 해결
2020년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단절되자 ‘와이어링 하네스(Wiring Harness)’라는 제품이 국민의 뇌리에 박혔다.
배선 뭉치라고도 불리는 와이어링 하네스는 인체의 신경망과 같이 차량의 여러 전기 장치에 연결되는 케이블 등의 배선을 묶어 각 시스템으로 전기신호와 전력을 전달하는 것으로 전선, 커넥터, 전원분배장치 등을 가공해 결속한 물품을 총칭한다.
주요 자동차부품이지만 사람 손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국내업체들은 반제품을 중국 현지에 세운 조립공장에서 완제품으로 만든 뒤 한국으로 수입해서 완성차업체에 공급해왔는데, 코로나19로 물류가 막혀 완성차업체가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공급망이 재개되었으나 이번에는 해상물류비가 급등하는 바람에 와이어링 하네스 업체들이 자금난을 겪기도 했다.
와이어링 하네스 이후 반도체라는 작은 부품 하나 때문에 완성차업체가 차를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공급망 체계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 원가급등으로 해외 임가공 결정
F사는 1989년 설립 이후 와이어링 하네스를 비롯한 관련 부품들을 생산·공급해온 자동차부품 전문 제조업체다.
F사는 국내에서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중국산 와이어링 하네스 공급 부족 사태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했다.
F사는 뼈를 깎는 원가절감을 통해 인건비 부담을 충당하면서 국내 생산을 고집해왔다. 해외 생산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다름 아닌 물류비가 비싸 제외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 의무화 등으로 인건비 부담이 크게 늘자 상황이 달라졌다.
국내 인건비 부담이 해외 물류비 부담을 넘어섰고, 완성차업체들의 단가인하 요청에도 맞춰야 해 F사도 해외 생산을 도입하는 것이 수익성을 위해 낫다는 판단이 섰다.
회사가 낙점한 국가는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에 1차 가공품을 수출해 현지에서 완제품으로 조립한 다음 국내로 들여오는 방안이었다.
검토 결과, 생산 원가절감 효과는 뚜렷한 것을 확인했다.
다만, 베트남으로 1차 가공품을 수출할 때와 완성품을 한국으로 들여올 때 지급해야 하는 관세가 원가절감 효과를 희석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FTA(자유무역협정) 활용도 검토했는데, 이러한 거래 과정을 통해 생산한 물품에 대해 한-베트남 FTA 원산지증명서의 유효성을 입증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F사는 그동안 국내 완성차업체에 제품을 공급하고, 제품을 탑재한 완성차가 수출됐을 때, 이를 수출로 인정받는 로컬수출 업무만 주로 해왔다.
즉, 완성차 업체에 원산지(포괄)확인서를 발급하는 제한적인 업무에만 익숙했으므로, 회사가 직접 수출입업무를 세관과 진행하는 본격적인 FTA 업무는 생소했다.
관세 8%, 한-베트남 FTA 적용 시 0%
F사는 지역 FTA활용지원센터에 연락해 회사의 고민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FTA활용지원센터에서 파견한 전담 관세사가 회사를 방문해 상황을 파악했다.
베트남 임가공 공장을 활용한 제품 생산방식의 핵심은 제품 원산지가 ‘역내산’ 판정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한-베트남 FTA 협정관세를 적용해 관세가 철폐되거나 낮아질 수 있다.
한국의 와이어링 하네스(HS코드 제8544.30호) 기본 관세율은 8%이며 한-베트남 FTA 협정세율은 0%이므로, 관세 실익이 크다.
양허 품목으로 지정해 단계적으로 관세를 철폐하는 한-중 FTA에 비해서도 훨씬 유리하다. 반드시 역내산 판정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와이어링 하네스의 원산지 결정기준은 세번변경기준이나 부가가치기준 등을 들지만, 이런 기준으로는 상대국에서 임가공 후 재수입하는 생산방식에선 충족하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보내는 반가공품의 원재료에 중국 등 제3국산이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분업이 일반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기준만 충족시킬 수 없으므로 다른 방법으로 원산지를 인정받을 수 있다.
누적기준 효과는 FTA 체약국끼리만
담당 관세사가 제시한 방법은 ‘누적기준’이었다.
FTA는 양자, 두 국가 간의 약속, 즉 수출입 시 관세의 장벽을 허물고 무역량을 높여 양국의 발전을 도모하는 약속이다.
누적기준은 이러한 FTA의 의도를 더욱 극대화하고자 만든 특례규정이다.
FTA 체약 당사국을 원산지로 하는 재료 또는 FTA 체약 당사국에서 수행한 공정을 상대국에서 그 효과를 그대로 계승하여 재료, 역내 공정 및 역내 부가가치비율의 형태로 포함해 원산지를 판정하도록 허용하는 기준이다.
간단히 말해 한국 기업과 베트남 기업 간 제조공정에서 나타나는 교역은 한 나라의 교역이라고 보고 원산지를 ‘역내산’으로 인정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적기준은 거의 대부분 협정 본문에서 규정하고 있으므로, 해외 생산기지를 운영하려는 국내기업들이 활용해볼 만하다.
누적기준의 유형은 크게 ▷대상 범위, 당사자에 따른 누적 ▷제3국간 관계에 따른 누적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대상 범위, 당사자에 따른 유형을 보면, ‘재료 누적’은 외국산 원재료를 우리나라의 원재료로 보는 것을, ‘공정 누적’은 외국에서 수행한 공정을 우리나라에서 수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역내 전 단계 생산자의 수행공정과 부가가치를 후 단계 생산자가 자기의 공정과 부가가치로 간주하는 것까지를 포함할 수 있다.
한-베트남 FTA는 재료 누적은 인정하지만, 공정 누적은 인정하지 않는다.
‘양자 누적’은 수출 당사국과 수입 당사국 간에만 이루어지는 재료 또는 공정누적을, ‘다자 누적’은 다수의 관련 당사자로 구성된 지역의 FTA 협정(예: 한-아세안, 한-중미 등) 하에서 이루어지는 재료 또는 공정 누적을 의미한다.
다자 누적 허용 시 관련 당사자들은 ANY PARTY (한-아세안), REPUBLICS (한-중미) 등으로 표기될 수 있다.
제3국간 관계에 따른 누적 구분 유형의 경우 ‘유사 누적(Diagonal accumulation)’은 각 국가 간 상호 FTA 체결 시 동일한 PSR(원산지 결정기준)을 가진 물품에 누적을 허용(예: EU-EFTA-ACP 국가 간 누적)하는 것이다.
‘교차 누적(Cross accumulation)’은 각 국가 간 상호 FTA 체결 시 상이한 PSR을 가진 물품에 누적을 허용하는 것이다.
한-캐나다 FTA 협정 하에서 미국 원산지(제84류, 제85류)의 누적이나, 베트남-EU FTA 협정 하에서 대한민국 원산지 누적(제61류, 제62류, 베트남에서 생산한 의류 수출 시 대한민국 원산지 직물)을 허용하는 것이 그 예다.
한편, 누적기준은 그냥 인정해 주지 않는다. 즉, 한-베트남 FTA를 활용하는데 해당 원재료가 베트남에서 제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을 베트남산으로 즉, 역내산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당 원재료가 베트남산 제품이고 국내 회사가 FTA 전 협정에 대한 원산지판정을 한다고 가정하였을 때, 해당 원재료는 한-베트남 FTA 적용 시에만 누적기준을 적용하는 것이지 나머지 FTA에서는 누적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해당 원재료가 한-베트남 FTA에 따른 원산지 결정기준을 충족하고, 해당 원재료에 대한 한-베트남 FTA 원산지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베트남의 경우 물품에 따라 한-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FTA와 한-베트남 FTA에 따른 특혜관세를 받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한-베트남 FTA를 적용하는 완제품에 쓰이는 원재료를 베트남에서 수입할 때 한-아세안 FTA 원산지증명서로 받아서 수입하였다면 한-베트남 FTA에 따른 누적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캄보디아 FTA 발효 시 진출 예정
누적기준을 활용해 F사는 관세 문제를 바로 해결했다.
F사는 한국에서 수출하는 반제품에 대한 협력업체의 원산지 충족 여부(실질적 변형 및 원산지 결정기준 충족 여부)를 확인하고 입증 서류를 확보해 FTA 협정세율을 원활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했다.
여기에 더해 F사는 현재 공급받는 원재료에 대해서도 FTA 협정세율을 이용, 구매단가를 낮춤으로써 최적의 생산 원가를 구성할 방법도 찾아 추진하고 있다.
베트남으로의 완제품 조립 생산구조로의 전환을 통해 F사는 수익성을 일시에 개선했다. 성공적인 첫 도전을 바탕으로 F사는 추가적인 해외 생산 네트워크를 검토하고 있으며, 여기서 우선한 고려 대상 역시 FTA다.
베트남 주변에 위치하면서 인건비가 훨씬 저렴한 좋은 생산 환경을 보유한 국가로 캄보디아를 눈여겨보고 있다.
대한민국과 캄보디아는 2021년 2월 3일 FTA 타결을 선언했으며, 양국 국내절차를 거쳐 정식 발효될 예정이다.
F사는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살려 캄보디아에서도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해 사업을 지속성장 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방침이다.
FTA의 효과를 본 F사는 사내에 FTA 관리 전산 프로그램을 구축, 제품을 공급하는 완성차업체에 원산지(포괄)확인서를 빠르고 정확하게 제출해 완성차 업체의 FTA 활용이 원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해외생산법인과의 업무도 효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FTA활용정책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