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라오스기행

kimswed 2008.09.16 09:45 조회 수 : 2554 추천:471



사진: 류기남(CREATION 발행인, CREATION AD., INC 대표이사)





솔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솔개는 평균 수명이 70년에 달할 정도로 장수한다. 맹금류이기에 딱히 천적이 없다. 훌륭한 비행 능력과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뛰어난 시력을 지닌 사냥꾼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어진 천수를 누린다.

태어난 지 40년쯤 지난 장년의 시기, 솔개의 위기는 내부로부터 다가온다.

발톱은 뭉툭해진다. 부리는 턱없이 길게 자라 사냥감을 낚아챌 수 없게 된다. 깃털은 날로 두터워져 비행마저 힘겨운 상태에 이른다. 이때 솔개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옛날의 영화를 추억하며 굶어죽던지,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출발의 길을 택하던지.

 

살기로 작정한 솔개는 대단히 고통스런 갱생의 길을 걸어야 한다. 먼저 웃자란 부리를 바위에 부닥뜨려 깨뜨려버린다.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면 그 부리로 뭉뚝한 발톱을 남김없이 뽑아낸다. 다시 발톱이 자라나길 기다렸다 그 발톱으로 두툼한 깃털을 하나하나 제거한다.

1년에 걸친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 끝나면, 솔개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태어난다. 뛰어난 사냥꾼의 능력을 회복하여 나머지의 삶을 기세양양 살아간다.

물론 과학적 근거를 지닌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의 우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절실함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구나 한번쯤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벗어나거나 아주 돌이켜야 할 때가 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도 솔개의 예화처럼, 혹은 축구 경기와도 흡사한 전, 후반이 존재하는 것일까. 인생의 후반전을 위한, 치열한 갱생의 순간이 누구에게든 예외 없이 다가올지도.......

 





필자는 지난 해 8월부터 줄곧 길 위에 있었다. 오는 6월까지는 계속 길 위를 떠돌며 서성이며 흘러갈 작정이다.

전업 작가로 살아온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여덟 편의 장편소설을 썼으니 제법 부지런을 떤 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위기를 맞이한 중년의 솔개처럼 막막했다. 터닝 포인트. 그렇다. 변화와 전환이 필요했다. 이제와는 다른 주제와 소재로 독자와 대면할 때였다.

순례자의 심정이랄까, 배낭을 둘러매고 집을 나섰다. 길 위를 떠돌며 터닝 포인트를 찾고 싶었다. 이집트와 요르단에서부터 시작해 실크로드, 네팔의 트래킹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라오스.......

 

가야 할 곳은 많았다. 라오스를 딱히 가슴에 품어둔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변방의 작은 나라 라오스일까.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하며 한 사내를 만났다. 몇 년째 자전거로 세계를 일주하는 스위스 사내였다. 트래킹 도중 종종 찻집에 마주앉아 이러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사내가 라오스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풍경보다 아름다운 곳!’

기슭에 닿는 잔물결처럼 다가온 말이었다. 한동안 곧이곧대로 사내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든지 달리 생각할 수 있었다. 풍경이 대수롭지 않아 부득불 사람에게 눈길을 줘야 한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라오스는 가슴에 새겨졌다. 어쩌면 네팔의 인도계 사람들에게 지쳐버린 탓일 수도 있었다. 필자의 일방적인 감흥이겠지만 인도계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의 경박한 말투와 뻔히 보이는 장삿속, 속내를 숨겨둔 듯 약삭빠른 삶의 태도. 히말라야의 장대한 설산을 바라보면서도 문득문득 사람의 향기가 그리웠고, 그럴수록 라오스는 반드시 가야할 곳으로 다가왔다.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넷 판에 <2008년 꼭 가봐야 할 53곳> 중 첫 번째로 라오스가 꼽혔다. 라오스의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하나하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새겨둘 밖에.

라오스는 한 달 일정으로 떠돌 계획이었다. 크리에이션의 류기남 사장이 일주일 동안 동행하기로 했다. 이후 배낭 여행자답게 60리터 배낭을 짊어지고 홀로 이곳 저곳 들쑤시고 다닐 참이었다.

 

라오스의 면적은 한반도의 1.1배. 그러나 인구는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5백만 명에 불과하다. 인구 밀도로 따지면 동남아에서 가장 적다. 국토의 7십 퍼센트가 산지로 이뤄졌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모습을 두고 돼지 허벅지를 닮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영락없이 해변에 외따로 비스듬히 서 있는 야자수와 같다.

 

라오스는 두 가지가 없는 나라이다. 우선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이다. 중국, 미얀마와 북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서쪽으로는 태국, 동쪽으로는 베트남, 남쪽에는 캄보디아에 둘러싸여 있다. 철도가 없다. 동남아국가의 철도 대부분이 식민지 지배국의 약탈 경제 수단으로 이뤄졌다면, 라오스는 경제적 가치로서 전혀 주목 받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사에서 눈길을 끌지 못한 라오스였다. 인도차이나에서 살벌한 식민정책을 내세웠던 프랑스에게조차 라오스는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호치민을 떠난 비행기는 캄보디아 프놈펜을 경유, 비엔티엔 왓타이(Wattai) 공항에 내려앉았다. 5십만 명이 거주한다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 

첫 방문지에 대한 인상 대체로 공항을 나서는 순간 좌우된다. 라오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길이 깔끔하고 주변의 풍경 또한 단출해, 한 나라의 수도라기보다는 작은 도시처럼 한가한 느낌마저 든다. 어느 서양인이 기술한 책에는 라오스를 ‘은둔과 고요함의 나라’라고 했다. 필자가 느낀 단출함, 그리고 한가함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라오스에 도착해 오래지 않아 ‘사람이 풍경보다 아름답다’는 이유를 실감케 된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이 없다. 목청 높여 악다구니를 쓰는 광경도 보지 못한다. 감정을 과장해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상대에게 화를 내는 자체를 매우 불경스런 행위로 간주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타인에게 욕설을 할 경우 법적으로 처벌을 받았다고 할 정도이다.

 

라오스는 알려진 바와 같이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다. 국가 경제의 상당 부분을 여전히 외국 원조에 의지하고 있다. 문화와 의료, 교육 시설은 열악하다. 평균 수명은 59세이며, 유아 사망률도 12퍼센트에 달한다. 문맹률은 전체 국민의 절반에 이른다.

공항에서부터 우리를 맞아준 교민 한승원씨는 라오스 사람들을 이렇게 평했다.

“성품이 어진 사람들입니다. 몇 년째 살고 있지만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욕심을 부리지도, 상대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법도 없습니다.”

기이한 노릇이다. 궁핍은 대체로 성품을 그악스럽게, 삶의 태도를 억척스럽게 만든다. 빈곤은 약탈 경제로 변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스 사람들은 전혀 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있다.

 

라오스 사람들이 세계 최상의 행복지수를 지녔다고 한다. 그러나 행복을 경제지표처럼 지수로 나눌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허무맹랑하다. 실제로 네팔을 두고 비슷한 내용의 발표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웬 걸? 필자가 직접 만난 네팔 사람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동자는 욕망으로 가득했고, 현실적 이해득실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일 수 있으리라. 라오스는 네팔과 함께 최빈국이라는 굴레를 안고 있다. 하지만 라오스 사람에게선 악착스러움도, 욕망이 시달리는 흔적 역시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선 자족의 넉넉함이 엿보였다. 안빈낙도라고 했던가. 그들의 얼굴에는 늘 부드러운 미소로 가득했다. 경제적 가치를 위해 발버둥을 치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행복지수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기준이라면, 그들은 분명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성싶었다.

일례로, 여느 관광지와 달리 라오스에서는 호객 행위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우격다짐으로 옷소매를 잡아 끄는 구걸의 모습도 보지 못했다. 상점에 들러도 이편에서 무엇을 요구하기 전까지 무관하다. 흥정도 따로 없다. 정해진 가격으로 끝이다. 때로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사는 이들과 마주한 느낌마저 든다.

 

태국과 국경을 나누고 있는 메콩 강변에 거처를 정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더딘 걸음새로 강변을 거닐거나 노천카페에 앉아 한껏 게으름을 부리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드문드문 한국이나 일본의 여행객도 보였다. 어느 쪽이든 결코 서둘거나 요란을 떠는 법도 없었다. 이방인들마저 물이 스며들듯 라오스의 분위기에 젖어 든 모양이다.

거리를 오가는 차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토바이의 행렬 역시 베트남에 비하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차들의 상당 부분은 한국산이었다. 특히 승합차인 스타렉스가 자주 눈에 띄었는데, 라오스의 베스트 카는 단연 스타렉스였다.

 

노천카페에서 만난 한 여행객의 말을 옮겨보자.

6년 전에 처음 라오스를 왔었죠. 라오스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다시 찾았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라오스가 강대국이 된 느낌입니다. 비엔티엔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고, 자동차도 어쩌다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라오스 교민 한승원씨가 문더나잇이라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강변에 기대 선 풍광이 뛰어난 곳이었다. 마침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간인지라 메콩 강의 황혼을 바라보며 마시는 비어라오의 맛이 나그네의 감흥을 배가시켰다.

신닷이라는 요리가 눈길을 끌었다. 굳이 한국어로 옮기면 전골요리라고나 할까. 이곳 사람들은 신닷이 한국 요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불고기 전골을 위한 양은냄비에 소고기, 혹은 돼지 삼겹살을 올려놓는다. 알맞게 구워진 고기를  라오스 식 소스에 찍어 먹는다. 대체로 라오스의 요리는 여느 동남아국가보다 동양인의 기호에 잘 어울린다. 그 중에 삥화무라는 요리 역시 권하고 싶다. 돼지귀 숯불구이인 셈으로 상추와 곁들여 먹으면 향도 맛도 일품이다.

 



라오스는 국교라고 따로 정해놓은 바는 없다. 통계에 의하면 95퍼센트가 테라바다불교, 즉 소승불교신자라고 한다. 사찰은 지역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며, 승려는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다. 그만큼 불교가 삶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제로, 도시를 벗어나면 사찰의 모습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특히 고지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에서는 샤머니즘 등 그들만의 토속신앙이 더 깊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라오스의 문화 유적은 불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남부 지방은 소승불교의 전래지로 알려진 캄보디아의 불교 건축 양식을 쫓으며, 중북부는 타이와 미얀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비엔티엔의 유적을 둘러보기 전에 역사에 잠시 주목해 보자.

라오스 전역에서 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므로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던 셈이다. 그러나 라오스가 역사의 전면으로 드러난 것은 란상왕국시대 (1353~1890)이었다.

란상왕국은 팡움왕에 의해 1353년에 루앙프라방에 세워졌다. 팡움왕은 크메르 왕국의 후원으로 원조를 받아 주변의 세력들을 통합하였고, ‘백만의 코끼리’를 상징하는 란상왕국을 태동시켰다. 한동안 강력한 세력을 떨쳤던 랑상왕조는 지금의 수도인 비엔티엔으로 천도를 했고, 약 200년 동안 존속하다가 1603년 다시 버어마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1637년에 술리나옹싸왕에 의해 다시 왕조가 재건되어 약 반세기 동안 황금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713년 왕국이 셋으로,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엔과 참파삭으로 나뉘었다. 왕국의 분열로 나라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라오스는 태국, 버어마, 베트남의 영향 아래 있는 시련기를 겪었다. 1827년에는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아누왕이 태국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곧이어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놓이면서 왕조의 명목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비엔티엔은 1500년대에 루앙프라방에서 이전된 후부터 라오스의 수도 역할을 해왔다. 5백 여년 역사를 견줄 때 많은 유적이 마땅하다. 그러나 1800년대에 태국의 침공을 받아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유적이 이때 사라졌다고 한다. 방콕 에머랄드 사원에 있는 에머랄드 불상도 이때 약탈해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엔티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은 파 탓 루앙(Pha That Luang)이다. 가장 신성시되는 곳이며 국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각종 여행 가이드북에 라오스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사원 사진이 바로 탓 루앙이다.

 



사원 전체가 황금빛으로 되어 있어 아름답고도 신비한 느낌을 준다. 라오스 전통에 따라 지어졌다는 사원의 건축 양식은 군더더기가 생략된 대단히 세련된 모습이다. 3층 기단과 중앙의 불탑으로 이뤄졌다. 중앙에 우뚝 솟은 탑은 45미터로 연꽃 봉우리를 형상화하였는데, 그 단순함과 미학적 상징이 품격 높은 회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파 탓 루앙은 1566년 건축되었다. 설립자 셋타티릿 왕의 동상이 사원 앞에 세워져 있다. 본래는 탓 루앙 주변에 4개의 사원이 더 있었지만 현재 북쪽과 남쪽만 남아 있다. 18세기 태국과 중국의 침략으로 무너진 것을 19세기에 들어 짜오아누 왕이 재건축하였다.

여행객과 신도들이 불탑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각 층을 돌아가면서 오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부타의 가르침을 벽을 따라 형상화해 놓았다. 사원 내부에는 라오스 불교의 종정이 기거하며, 11월 중순에는 비엔티엔 최대의 축제인 탓루앙 축제가 열린다.

 

 

 

시사케트(Sisaket)사원은 현재 대통령궁으로 사용되는 옛 왕궁의 앞뜰에 위치해 있다. 비엔티엔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태국의 그것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19세기 초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그러나 1829년 대화재로 하나의 탑을 제외하곤 전소되었다. 1924년 처음으로 복원 공사가 이뤄졌고, 1930년에 이르러 대규모로 복원 증축되었다. 청동 불상과 19세기 초 공예의 특색이 잘 나타난 120개의 석회석 불상이 남아 있다. 그밖에 금은세공품과 사파이어 공예품이 국보로 지정 전시되어 있다. 

 

 

 

비엔티엔 남쪽으로 태국과의 국경을 잇는 ‘우정의 다리’를 지나 24킬로 지점, 메콩 강변에 불교 공원이 있다. 시엥쿠안(Xieng Khuan)으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힌두의 양식을 그대로 옮겨놓은 조각품과 다양하고도 특이한 불상들을 볼 수 있다. 시멘트로 지어놓은 것이므로 역사적 의미나 세월의 향취는 느낄 수 없다. 

파툭사이(Patouxay)는 승리의 문, 혹은 개선문(Arc de Triumph)이라고 불린다. 1960년대초 혁명전쟁 이전의 라오스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건축되었다고 한다. 겉 모양새는 파리의 개선문을 따랐고, 내부의 벽화와 조각은 라오스 전통 양식으로 이뤄졌다. 탑 위에 올라가면 비엔티엔의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탑 전면에는 최근 중국의 원조로 지어진 분수 광장이 눈길을 끈다.

 

비엔티엔은 분주함보다는 느림이 어울리는 곳이다. 비엔티엔 뿐만 아니라 라오스 자체가 그렇다. 관광 유적지 역시 산책하듯 한껏 게으름을 부리며 걷거나 자전거를 빌려 유유자적 둘러보는 것이 어울린다.

라오스의 역사 자체가 일천하다. 따라서 대단한 유적을 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불교 유적을 따지자면 태국이 화려하고 웅장하다. 역사적 의미나 규모 면에선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견줄 만한 데가 없다. 따라서 볼거리를 앞세우기보다는 사람과 자연의 향기 속에서 느긋함을 즐기는 곳이 바로 라오스이다. 그런 곳이 바로 방비엔이다.

 

비엔티엔에서 방비엔으로 가는 도중 남능댐에 찾았다. 수력발전을 위한 인공호수인 셈이었다. 바다처럼 넓은 수면 위에 옛날 산봉우리였을 섬들이 점점이 떠 있었다. 호수의 섬들에는 리조트는 물론 카지노까지 자리하고 있단다.

수력발전은, 외국 비행기의 영공 통과료와 함께 라오스 경제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라오스 정부는 수력발전 설비에 공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재 상당 부분의 전력이 이웃나라로 수출되고 있다. 인도차이나의 배터리라고 불릴 정도라고 한다.

 



방비엔은 비엔티엔에서 북쪽으로 16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라오스의 계림이라 일컬어질 만큼 산과 강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석회석으로 이뤄진 산은 오랜 풍화작용으로 기묘한 모양새를 지녔다. 그 산을 굽이굽이 끼고 도는 쏭강이 아름답다. 산허리에 구름이라도 걸릴라치면 마치 선계로 뛰어든 느낌마저 든다.

 



기묘한 산과 아름다운 강이 나그네들의 놀이 공간이며 쉼터가 되어준다. 단연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쏭강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레프팅으로 카약킹, 튜브 타기인 튜빙이다. 하루 진종일, 혹은 반나절 코스의 투어 상품들이 마련되어 있다. 또 석회석으로 이뤄진 탓에 방비엔 주위에는 석회동굴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나그네를 위해 본격적으로 개발된 동굴은 없다. 동굴 안에 전기 시설이 되어 있지 않으며 안전을 위한 대비도 허술하다. 동굴 탐사의 심정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탐짱 동굴(Tham Chang)로 가는 도중, 한 마을을 지나치다 장례식과 마주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주검이었다. 마을은 물론 인근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듯 분망했다. 죽음을 애도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작은 축제를 즐기는 광경이었다. 한쪽에서 장례에 쓰일 소를 도살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웃음 띤 얼굴로 이야기에 한창이었다. 우리의 상여를 닮은 수레 위에 누워 있는 여인, 그녀의 딸인 듯한 처녀의 울음만 아스라이 들려왔다.

탐짱 동굴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집 한 채 들어설 만큼의 공간이었고, 중앙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강원도의 환선굴 등의 풍경을 기대했다면 실망일 것이다. 종유석과 석주가 제대로 발달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그마저 드문드문 훼손되어진 채였다.

 

탐짱 동굴에서 돌아오는 길. 작은 나무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숲으로 방향을 틀어 5백미터만 전진한다면 환상적인 동굴을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땀짱동굴의 아쉬움 때문에 즉각 미지의 동굴로 향했다.

아뿔싸! 5백미터가 왜 이리 길담. 가도가도 더 이상의 안내 간판은 없었다. 단지 나무 가지에 등산용 비표처럼 비닐봉투가 이따금씩 매달려 있었다. 왠지 잘못 말려든 기분이랄까. 사내 둘이고, 게다가 용맹무쌍한 류가 곁에 있지 않은가. 내처 걷기 시작해 반 시간 가까이 지나 산길을 벗어났다. 추수가 끝난 들판이 나타나고 들판 끝 자락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곳이 매표소인 셈이었다.

입장료를 지불하자 늙수그레한 사내가 손전등을 들고 따라 나섰다. 류의 안색은 당장 변했다.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한 탓이었다. 작은 개울을 건너자 울창한 숲 가운데 연못이 드러났다. 동굴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곳이었다. 연못을 지나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류가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으며 안내인 사내에게 물었다, 목욕을 해도 되느냐고.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가벗고 해도 되느냐고, 다시 물었다. 사내는 또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류는 냉큼, 그리고 훌훌 세상의 치장들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자연 속으로 돌아갔다.

동굴은 안 볼 거냐는 필자의 물음에, 류는 봐도 소용없을 거라며 연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사진작가가 현장을 보지도 않고 판단을 내린다니? 은근히 부하가 치밀었다. 필자는 안내인을 앞세워 동굴로 들어갔다. 불빛 한 점 없고, 뱀의 굴처럼 좁았고, 바닥은 마치 빙판이 진 듯 미끄러웠다. 오래지 않아 필자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엉덩이쯤 상하는 건 문제될 것 없었다. 밥 먹으면 나을 테니까. 문제는 넘어지면서 카메라를 박살을 냈다는 점이었다. 동굴은 무슨 동굴? 발가벗고 멱이나 감았어야 할 것을........ 결국 류의 판단은 옳았고, 류의 결정은 더더욱 적절했다.

 

카메라의 고장은 결국 라오스 여행을 중단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글쟁이에게 카메라가 무슨 대수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뷰 파인더로 바라보는 세상의 깊이에 익숙해졌다. 혹은 가슴에 새긴 이미지를 사진으로 확인하면서 그때의 감흥으로 되돌려야 할 만큼 나이가 들어버린 탓일 수도 있었다.

 






방비엔에서 산허리를 비켜 지나고 고개를 넘고 넘어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에 도착했다.

방비엔에서 루앙프라방까지의 길은 대단히 아름답다. 산의 모양새는 빼어났고, 자연에 기대 사는 고산부락의 모습도 정겨웠다. 그러나 위험천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반군의 테러로 외국 여행객의 인명 피해가 났던 곳이다. 현재 완전히 사라졌다지만, 이 길을 한밤중에 넘는 것은 여전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루앙프라방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라오스 제일의 고도이다. 그러나 루앙프라방에 대한 소개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일정상 루앙프라방을 자세히 돌아보지 못한 탓, 그리고 원래의 계획대로 여행이 이뤄지지 못한 까닭이었다.  

 

라오스는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었다. 비엔티엔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루앙프라방과 루앙남파 등의 북부, 그리고 남부지역. 지금은 루앙프라방의 역사와 유적 등을 다음 기회에 자세히 전할 것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루앙프라방에서 동쪽으로 달려 시엥쾅 주에 도착했다. 폰사완이라는 곳은 고도 1천4백 미터에 위치한 고원이다. 베트남의 달랏에 해당하는 곳이다. 온통 소나무가 군락을 이뤘고, 이따끔 구릉지와 초원이 하늘에 잇대어 있다. 류의 전언에 의하면, 아열대 기후에서 8백미터가 넘으면 커피나무를 재배하고, 1천2백미터가 넘으면 소나무가 서식한다.

 




폰사완에는 항아리 평원(Plain of Jars)이 있다.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초대형 사암 항아리들이 평원 곳곳이 자리하고 있다. 이스트 섬의 석상이나 영국의 스톤헨지처럼 불가사의한 곳이다.

항아리들은 보통 한 장소에 12개 정도이며, 모두 250여개가 산재해 있다. 일반적으로 항아리 한 개의 무게는 600킬로그램에서 1톤 정도에 달한다. 6톤에 가까운 엄청남 크기의 항아리도 있다. 물론 작은 것들도 있었겠지만 사람의 손길에 의해 훼손되었을 것이다.

이 항아리들이 언제,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해명은 아직 없다. 다만 2천년 전으로 추정된다. 재질이 된 사암은 인근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옮겨와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곡식 저장이나 술 용기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혹은 우리의 도자기관을 염두에 둘 때, 석관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어느쪽이든 추정에 불과하다.

 

드넓은 초지에 수많은 돌항아리들이 늘어선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의 흐름 앞에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역사는 흘러갔고 흘러가는 중이고 또 흘러갈 테지만,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하구의 모래톱에 싸이는 작은 알갱이처럼, 나는 무엇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 나란 존재를 남겨둘 것일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먼 훗날까지 기억될 것일까.

 

땅거미가 내려앉는 항아리 평원에서 다시 솔개를 생각한다. 그리고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야 할 솔개처럼 비장하게, 황혼의 너머를 바라본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분명 떠오를 테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