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에 있는 나라다. 북쪽은 중국, 서쪽은 라오스·캄보디아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태평양이 흐른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외세의 침략이 잦았으며, 1884년 프랑스 식민지로 편입됐다.
오늘날의 베트남공화국이 건국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9월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외세로 인한 혼란이 끊이지 않았고, 1954년 공산당이 북베트남의 프랑스 세력을 물리친 후 북위 17。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져 20여 년간 내란에 시달렸다.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이 1961년 참전하고 한국도 지원군을 보냈지만 1975년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베트남이 승리했다. 이로 인해 한국과는 1992년에, 미국과는 1995년에 뒤늦게 국교가 이뤄졌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이 나라는 국토의 4분의 3이 산지다. 모든 국토가 북회귀선의 남쪽에 위치해 열대몬순 기후를 나타낸다. 5~10월은 우기, 11~4월은 건기에 해당하며, 계절은 크게 여름과 겨울로 나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연말~연초가 겨울이지만 기후는 한국의 늦가을 수준이다. 연평균 기온은 23℃ 안팎이며, 겨울에도 15℃ 안팎이어서 여행하기에 적합하다.
베트남 중부의 항구도시. 도심을 세로로 가르며 흐르는 강 때문에 지역이 동서로 나뉜 다낭은 요즘 동남아에서 가장 뜨는 여행지다. 관광과 휴양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고, 도시와 시골의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어 ‘팔색조의 매력’을 갖췄다고 얘기된다.
해안을 따라 각종 고급리조트가 속속 들어서고, 전용 수영장이 딸린 풀빌라 등의 고급 숙소도 즐비해 신혼부부를 위한 허니문 여행지로도 각광받는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최대 군사기지로 활용됐으며, 우리나라에서 파병된 청룡부대도 이곳에 주둔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앞서 인도네시아계 참족이 세운 참파 왕국(2~17세기)이 이곳을 거점으로 세력을 형성한 결과, 당시의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남아 있다.
1923년 프랑스 식민 시절에 지어진 중세 양식의 건축물. 성당 지붕의 닭 조각상 때문에 현지에선 ‘치킨 성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예수의 첫 번째 제자인 베드로를 기리는 성당답게 성모 마리아 외에 베드로 조각상도 눈에 띈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 유려하게 솟은 뾰족 지붕과 화사한 분홍색 외벽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름답다. 이러한 외관 때문인지 복잡한 도심에 있는데도 평온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다낭 외곽에 있는 오행산은 5개의 봉우리와 수많은 호수로 이뤄진 산이다. 5개의 봉우리가 화·수·목·금·토(불, 물, 나무, 금속, 흙)의 오행을 관장한다고 해서 ‘오행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산 전체가 대리석으로 이뤄져 있어 ‘마블산’(marble; 대리석)이라고도 불린다.
5개의 봉우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물을 관장하는 ‘투이손’이다. 이 봉우리에는 많은 사원과 탑이 있으며, 수많은 동굴마다 불상이 모셔져 있다. 156개의 계단을 올라가 정상의 전망대에 도착하면 나머지 4개의 봉우리와 마을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산기슭의 마을 공방에서는 대리석 제품을 만드는 과정도 구경할 수 있다.
다낭 근교에 있는 해발 1천487m의 산. 산에 바나나 나무가 많은 데서 ‘바나산’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이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는 세계에서 제일 긴 길이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산 입구에서 정상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5천42m를 이동하며, 시간은 20분가량 걸린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운해가 장관을 이루지만 이 때문에 다낭 시내는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산 정상에는 프랑스풍의 테마파크가 자리 잡고 있다. 놀이시설과 함께 호텔, 식당, 쇼핑몰, 성당 등도 조성돼 있어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후에는 산과 숲에 둘러싸여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꼽힌다. 1600년대에 베트남 중·남부를 지배했던 구엔 가(家)의 수도였으며, 구엔이 왕조를 이룬 후에는 수도로서 더욱 번창했다. 그러나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된 후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이 새로운 수도로 정해지면서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설상가상으로 1968년에는 공산당의 공격으로 유적과 유물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재건을 통해 꾸준한 복구에 나서 199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
아내와 첩이 100명을 넘지만 아들이 없었던 뜨둑(1829~1883) 황제의 무덤. 흥미로운 점은 이 황릉에 뜨둑 황제의 시신이 안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는 다른 장소에 묻혔으며,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당시 황제의 시신 안치에 참여했던 노동자 200여 명은 모두 참수 당했다.
이 황릉은 뜨둑 황제가 생전에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아들이 없어 뜨둑 황제가 직접 자신의 업적을 새긴 묘비도 이 황릉에 세워져 있다.
구엔 왕조의 황릉 중 가장 유명한 곳. 카이딘(1885~1925) 황제는 이 무덤을 1920년부터 짓기 시작했으나 완성된 것은 사후 6년이 지난 1931년이다.
후에의 여러 황릉 중 규모가 제일 작지만 가장 최근에 조성됐다. 당시 유행했던 유럽식 건축 양식에 전통 베트남 양식을 융합해 외관이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내부의 바닥과 천장까지 각종 도자기 조각을 이용한 모자이크 방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을 정도다.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지은 태화전도 볼 만하다.
후에 시내에서 향강을 따라 남서쪽으로 4km가량 달려가면 나타나는 사원. 이 사원은 1601년에 세워진 7층 석탑 때문에 더 유명하다. 높이 21m가 넘는 이 탑이 베트남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건축 당시 탑의 각 층에 금동 불상을 안치했지만 도난당해 지금은 볼 수 없다. 또 탑의 양쪽에는 정자가 하나씩 있는데, 한쪽 정자에는 거북 등 위에 세워진 비석이, 다른 쪽 정자에는 2t이 넘는 거대한 종이 여행객들의 눈길을 끈다.
이 탑과 정자를 제외하면 사원은 비교적 간소하게 지어졌다. 그러나 1665년부터 건축물이 하나둘 들어서고, 1714년 사원 역사상 가장 큰 확장 공사를 거쳐 오늘날의 위용을 갖추게 됐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30km 지점에 위치한 무역도시. 16세기부터 인도, 포르투갈, 프랑스,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상선이 오가며 도자기 등을 교역했다. 특히 일본과의 교역이 잦아 도시 곳곳에서 일본 문화의 흔적이 엿보이지만, 프랑스 식민 시절의 흔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반적인 도시 외관은 중국인들에 의해 형성됐으며, 지금까지도 17세기의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다.
아오자이를 휘날리며 달려가는 오토바이의 물결도 없고, 줄지어 선 빌딩도 없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이곳의 구시가지는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그럼에도 하노이나 호찌민에 비하면 낯선 이 도시를 베트남 시민들은 ‘베트남 최고의 여행지’로 주저 없이 꼽는다.
힌두교의 ‘시바’ 신을 모시기 위해 목조 사당을 지으면서 참파 왕국의 종교적 성지로 자리 잡은 곳. 8~13세기에 지어진 대부분의 벽돌 건축물은 참파 왕국이 멸망한 뒤 오랫동안 정글 속에 묻혀 있다가 19세기 들어 프랑스 탐험가에 의해 발견됐다.
그 후 베트남 전쟁을 겪으며 상당수가 붕괴됐는데도 여전히 ‘베트남의 앙코르와트’로 불리며,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벽돌을 끼워 맞춘 특유한 방식의 건축 기법과 벽면을 장식한 여신상은 당시 참파 왕국의 문화·예술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말없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