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터널

kimswed 2006.10.11 16:13 조회 수 : 3359 추천: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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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잡소리' 리바이벌 : 의도 혹은, 열망하지 않았던 여행 한번이 사람의 전 생애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 내가 그랬다. 아래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경험했던 한 사내가 '결혼하는 남자'가 아닌 '여행하는 남자'로 자신의 나머지 생을 살기로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스케치다. 재밌다.

밑의 두 졸고 '캄보디아, 헐벗은 천사들의 나라'와 '베트남 밤거리가 위험해?'를 읽은 후 보는 것이 옳은 독서법이다.


                            (구찌터널 입구로 들어가는 시범을 보이는 베트남 현지 가이드)

"여기는 참회의 터널..."


남부 베트남의 땅 속으로 수백 Km 이어져 있는 터널. 그중 일부인 구찌터널 속을 5분여 헤맨 원광대 김재용 교수는 잘라 말했다. "여기는 참회의 터널이다." 그의 말이 맞다. 그것이 대의명분에 의한 것이든, 자국의 이익확보를 위한 것이건, 그 어떤 이유에서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참회해야 마땅하다.


항불 시기부터 전술적 필요에 의해 정글 속에 파기 시작한 베트남의 땅굴은 미국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60년대 후반 미군 특수부대의 골칫거리 중 골칫거리였다. 폭탄으로도 독가스로도 궤멸시킬 수 없었던 거미줄 같은 땅굴과 그 땅굴을 거점으로 게릴라전을 벌이던 베트남의 아버지와 아들들.


전날 밤 작가 몇몇과 어울려 베트남의 밤거리를 쏘다니느라 곤한 몸을 겨우 일으켰다. 1월30일 아침이었고,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싫든 좋든 나는 또 지긋지긋한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호치민 시에서 버스로 1시간 가량 떨어진 구찌터널과 호치민 시내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을 둘러보는 것. 서툴렀던 첫 외국여행 5일의 기억까지 부랴부랴 가방에 구겨 넣고 숙소를 나섰다.


설날을 맞아 북적이는 노점과 장터거리를 지나 구찌터널에 도착한 시간은 정오경. 구찌터널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과 그곳에서의 전투장면 등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30분간 시청했다. A4용지 한 장 크기의 터널 입구는 보기만 해도 폐쇄공포증을 불렀고, 미군에 아버지를 잃고 '항미전사(戰士)'로 존재를 바꾼 베트남 소녀가 든 총은 그녀의 조그만 몸에 비해 너무나 커 보였다.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포탄이 떨어진 자국이 선연히 남아있고, 살포된 미군의 고엽제 탓에 나무들이 성장을 멈춘 구찌(마을 이름)의 숲과 터널을 돌아봤다. 포획된 미군의 탱크와 수많은 부비트랩과 항미전쟁 당시 터널에서의 생활을 재현·전시해놓은 그곳을 거닐며 우리는 참담했고, 가슴 한 구석이 저렸다.


           (구찌터널 인근에 전시된 미군탱크. 베트남 코뮤니스트들의 공격으로 파괴된 형상이다)

전쟁은 절대악 외에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정치적 지향 혹은, 이데올로기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자국의 지속적인 이익확보를 명분으로 시작되는 전쟁은 인간이 언제건 무자비한 야수로 변할 수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절대악이다. 전쟁 안에는 어떤 낭만도 있을 수 없다.


연마된 강철로 만들어진 탱크의 포신과 소총의 탄알과 부비트랩의 쇠꼬챙이 앞에 인간의 육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 전쟁은 그 무력한 육체 속에 깃든 고귀한 영혼까지 송두리째 파괴한다. 전쟁은 인간만이 생존을 위한 이유가 아님에도 동족을 살해하는 동물이라는 참혹한 사실을 뼈아프게 상기시킨다.


전쟁을 직접 체험한 베트남 작가 바오닌과 반레의 <전쟁의 슬픔>과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을 읽으면서 느꼈던 서늘한 공포감과 목을 옥죄던 두려움이 좁디좁은 구찌터널 입구를 들락거리는 시범을 보이는 베트남 가이드의 행동을 보며 다시 떠올랐다.


무엇이 베트남 사람들을 온갖 열대과일 풍성하게 익어가는 벌판 대신 어둡고, 습하고, 갑갑한 땅굴 속에서 살게 만들었던가.


끔찍하기 짝이 없는 부비트랩들을 관람한 후 구찌터널을 직접 체험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관광객을 위해 등(燈)을 달고, 폭을 넓혔음에도 15~20m의 땅굴을 오리걸음으로 걸으니 온몸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막막한 어둠에 숨이 턱턱 막혀온다. "이제 50m의 '진짜 구찌터널'로 가보자"는 가이드의 말이 '지옥으로 가보자'는 것처럼 들린다.


생각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저질러지는 강대국의 온갖 전횡을 막기 위해서라면, 신음하는 식민지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라면 나는 과연 기꺼이 구찌터널에 들어가 총을 들 수 있었을까? 베트남이 아닌 내 나라에서 자유와 독립을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면 나는 스스로 삽을 들어 땅굴을 팔 수 있었을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전쟁은 승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끝나지 않고, 승자가 정해지기 위해서는 더욱 가혹해져야하는 아이러니다. 승리하기 위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캄캄절벽의 구찌터널을 기어다녔던 베트남 사람들에게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어떤 의미였을까.


구찌를 떠나오며 나는 다소 위험할 수도 있는 개인적 결론 하나를 얻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었고, 전쟁이란 있어서는 안될 절대악이지만, 식민지 지배를 통한 지속적인 자국이익 확보를 위해 총을 든 미국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총을 든 베트남에게 똑 같은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것.


그날 오후 나는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金星紅旗)'가 도안된 반팔셔츠를 1달러50센트를 주고 샀다. 붉은 바탕에 새겨진 노란 별은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라는 이기심만으로 가득 찬 나에게도 이제는 국민윤리 교과서 속에서나 겨우 발견할 수 있는 '조국을 위한 희생'이란 문장을 떠올리게 해준다.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갈 베트남이여, 안녕


그 역시 전쟁에 대한 반성과 아픔의 역사를 담고 있는 호치민 시 전쟁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베트남에서의 공식 일정은 끝이 났다. 이제 유람선에 올라 메콩강의 야경을 바라보며 만찬을 즐기는 일만이 남았다. 보기에도 휘황한 3층의 거대 유람선.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3인조 여성공연단의 '불쇼'가 펼쳐지고, 술 취한 한국 관광객들이 '비 내리는 고모령'과 '찬찬찬'을 박자 무시하며 불러대던 선상(船上)에서의 식사시간은 최악이었다. 한국의 관광버스에 탄 처참한 기분. 강 중심을 운행하는 배인지라 내릴 수도 없어 꼼짝없이 그 난리판을 지켜봐야만 했다. 차라리 타지 말 것을.


상했던 마음은 선착장 인근 벤치에 서로의 몸을 기대고 앉아 키스를 나누는 베트남의 젊은 연인들을 보고서야 간신히 풀렸다. 관광객들이 보거나말거나 자신들의 애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그들의 얼굴에선 전쟁의 어두운 그늘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난이 주는 생채기 따위도 없었다. 그들은 당당했고, 그랬기에 아름다웠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던 '원 달러'를 그 연인들에게 내밀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아마도 보는 앞에서 그 알량한 지전(紙錢)을 찢어버리며 "우리가 어떤 민족인줄 알고 이 따위로 자존심을 우롱하느냐"고 말했을 것이다.


          (좌측이 베트남 작가동맹 부총서기 안득, 오른쪽은 혁명가이자, 소설가 또한 시인인 반레)

베트남 작가동맹 부총서기 안득은 말했다. "미래는 청년들의 것이지 우리(전쟁을 겪었고, 반외세 투쟁을 전개한 중장년층) 것이 아니다." 그 말이 맞다면 베트남의 미래는 진실하고 당당할 것이며, 진실하고 당당한 청년들은 전쟁과 학살, 곤궁과 궁핍의 시대와는 또 다른 베트남을 살아갈 것이다.


31일 새벽 1시. 인천공항을 향해 비행기가 이륙했다. 생경한 5박6일의 체험. 나는 무엇을 보았고, 어떤 걸 얻었는가. 그 경험의 모두 다를 내 삶의 자양분으로 체화시키지야 못하겠지만, 가난 속에서도 아름다운 영혼을 키워가던 캄보디아 아이들의 눈동자와 베트남 청년들이 보여준 승리자로서의 당당함만은 일생을 두고 기억할 수 있으리라.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까지 캄보디아와 베트남이여, 섭섭허이.

* '섭섭허이'는 '사랑해요'라는 뜻의 캄보디아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