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지체되어 캄보디아에서 9시가 넘어서 출발했으니 모두 기진맥진 정신이 없다. 하지만 공항 밖의 싸늘한 밤공기가 우리를 바짝 긴장시킨다. 하노이는 우리나라 초가을 기온인데다 밤이라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춥다. 모두들 반소매를 입고 있었던 거다.
숙소에 들어와 피곤한 몸을 뉘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아직도 마음은 캄보디아의 씨엠립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난 베트남을 더 좋아하는데 웬일인지 씨엠립을 다녀온 후로는 캄보디아가 온통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다. 앙코르 유적의 웅장하면서도 토속적인 면모는 숙연함으로 뇌리 속에 뚜렷이 자리잡았고 씨엡립과 톤레샵에서 만난 캄보디아 사람들의 순박한 미소는 친근감과 함께 강한 연민을 가지게 했던 거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이들도 모두 그렇단다. 캄보디아의 섭형과 ‘살인미소’아저씨가 그새 보고 싶단다.
느즈막히 일어나 오전에 호치민영묘와 호치민 생활관, 그리고 중국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는 문묘를 돌아보았다. 아침의 하노이 거리는 생동감과 활기 그 자체이다.
가이드 말로 베트남 직장인들은 게으르다는데(30분 늦게 출근, 느슨한 점심식사, 30분 일찍 퇴근 등), 거리에서 여유와 느슨함은 찾아볼 수 없다. 남녀노소 구별없이 오토바이 부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질주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폭주족을 연상케 할 정도지만 차이가 분명히 있다. 우리나라의 폭주족은 취미 혹은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서 생사를 뛰어넘는 살벌한 질주를 하지만 베트남 오토바이 부대는 생계 수단으로서 가족이나 짐을 싣고 정감(?) 있는 ‘달리기’를 한다.
베트남에서 오토바이가 없으면 남자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차와 차보다 수십 배 많은 오토바이가 도로를 꽉 메우고 진행하는데, ‘빨리 가라’ ‘왜 끼어드냐’ ‘비켜라’ 등의 표시로 차와 오토바이들이 쉴새없이 경적을 울려댄다. 여기서 여유를 부리다간 맞아 죽기 십상일 것 같다. 위태롭고 시끄럽기도 하지만 정말 진풍경이다.
옷차림과 행동에서 경건함과 엄숙함을 최대한 갖추고 밀랍처럼 차갑게 누워있는 호치민을 접견한다. 개인적으로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침략과 학살에 대항하여 승리한 호치민과 베트남 민중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호치민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정말 진심이다. 바딘 광장의 현수막에 씌어 있듯이 호치민은 정말 베트남 민중들에게 영원히 살아 숨쉬는 신적 존재인 것 같다.
< 호치민 영묘> |
오후에 하노이를 떠나 하롱베이로 향하는 지루한 버스 여행을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선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이곳은 도로 사정 때문에 배가 더 걸린다. 다소 지루하긴 했지만 창밖으로 베트남 풍경을 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 되었다. 베트남의 농촌은 우리나라와 아주 흡사하다. 현재 겨울이라지만 우리나라 초가을 기온이라서 모내기하는 모습이 눈에 자주 띈다. 기계화가 아직 되지 않아 사람들이 직접 모를 심는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 70,80년대의 모습이다.
<천상 우리나라 시골 마을 풍경이다>
집 근처에는 채소를 비롯한 각종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이곳에선 꽃도 노지에서 재배하고 있다. 농사철도 지역적으로 구분이 되는지 어떤 지역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인데, 어떤 지역은 아직 물도 대지 않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드넓은 평야에 물이 넘실거리며 흐르는 수로, 여기 저기 논밭을 메우고 자라고 있는 작물들...... 확실히 베트남은 도시든 농촌이든 가능성이 있다. 다시 캄보디아 사람들의 삶의 질곡이 떠올라 마음이 무겁다. 찌는 듯한 더위에 메마른 땅, 정부 정책의 부재 그 어떤 것도 그들 편이 아니지만 소박한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그들, 어찌 그들을 잊을 수 있으랴! 그들도 이런 풍요를 알게 되면 좋으련만.
궂은 날씨 속에 드디어 하롱베이에 도착, 초입에서 느끼는 하롱베이에 대한 첫인상은 삭막함이다. 해외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기존 시설들이 개발, 확대되고 있는 듯 흙으로 메우고 도로 구획하는 중이라 환상적인 해변도시의 아늑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숙소의 넓은 창으로 하롱베이의 해안을 감상할 수 있어 위안을 삼는다. 숙소가 있는 곳은 어느 정도 정비된 듯 해안 쪽에 공원 혹은 놀이 시설로 보이는 시설들이 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안개가 아니었다면 섬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티톱섬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여유있게 돌아보고 배에 오르니 점심이 준비되어 있다. 천하 절경의 하롱베이를 둘러보며 금방 요리된 음식을 앞에 놓으니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황제가 부럽지 않다. 배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가족만을 위해 일하는 것이 낯설고 미안하지만 한 번의 경험이니 그냥 기분 좋게 느끼고 싶다.
예상했던 것처럼 하롱베이 유람은 편안하게 배 안에서 먹고 즐긴 여행이었다.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 답사가 찌는 듯한 더위속의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하롱베이의 편안한 여행은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모두들 편안한 하롱베이 유람보다 힘들게 여행한 앙코르 유적 답사가 기억에 남는단다.
베트남 민중의 고통스런 승리의 역사는 남 베트남의 호치민시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베트남의 하롱베이를 다녀왔지만 난 아직 베트남에 가보지 못했다. 호치민시에 있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거점인 전월맹군 지하사령부 구찌터널을 보지 않고서 베트남 역사를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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