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필자의 가장 큰 고민은 시간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하고픈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정신 차려 보면 또 오늘 밤이다.
상하이로 부임한 지 벌써 1년 4개월이 지났다. 지난해 1월 24일에 입국하자마자 코로나로 3주간 호텔 격리를 당하고, 2달간 집에 갇혀 상하이 대봉쇄를 겪었다. 이후 1년 내내 회사, 공원 등 모든 공공장소 출입 시 휴대폰 앱 스캔이 기본이었고, 2~3일에 한 번씩 코로나 핵산검사 및 자가항원검사를 받아야 했다. 섣불리 타 지역에 갔다가 급작스러운 방역정책 때문에 그 지역에 갇혀 귀가하지 못할까 봐 관할지역 출장도 없었다. 간신히 중국 유관기관과 만든 사업이나 우리 진출기업들과 잡힌 회의들은 준비를 다 해놓고 취소되거나 연기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1년을 보내버려서인지 대부분의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온 지금 1분 1초가 더더욱 소중하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의 ‘상하이살이’
코로나19가 앗아간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살아남은 더 많은 사람의 삶에 끼쳤을 엄청난 영향을 생각하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고민’이라는 건 배부른 소리임을 안다. 그래도, 지난해 3월 말에서 5월 말까지 상하이에서 21세기에 겪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겪어내고 살아남은 우리 동지(?)들끼리 “상하이 봉쇄를 안 겪었으면 말을 하지 마”라거나, “봉쇄를 안 겪은 사람은 진정한 중국 전문가가 아니다”라며 허세 아닌 허세를 부려보는 작은 사치(?)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코로나19 방역 격리조치가 산발적으로 반복되던 작년 3월 말이었다. 4일만 봉쇄하겠다고 해서 딴엔 넉넉히 2주 정도 분량의 식량과 생활용품을 준비했었는데, 마치 오늘 줄게 내일 줄게 계속 미루다가 나중에는 아예 쓱 입 닦아 버리는 악성 채무자처럼 봉쇄는 기약 없이 늘어져만 갔다.
4월 한 달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갔고, 그 상태에서 식량은 같은 아파트 동 사람들끼리 위챗 대화방에서 공동구매를 하거나, 취(區) 정부에서 배급해 줬다. 배급품의 횟수와 품질은 천차만별이었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한국인들이 많이 살지 않아서 봉쇄 기간 한국 식품 등의 공동구매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지만, 대신 배급 횟수가 15회 이상이었고 종류도 다양했으며, 품질도 참을 만했다. 소문에 의하면 우리 취에 상하이시 고위인사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중엔 배급품 수령이 반가움보다는 실망이었다. ‘얼마나 더 가둬두려고 또 배급을 해 주나’ 싶었기 때문이다.
봉쇄 초기엔 식량 구하기가 힘들어, 종일 같은 동 주민들의 위챗 대화방을 눈이 빠지게 들여다봤다. 혹시 내가 필요한 물자의 공구가 올라오나 해서다.
필자의 회사는 봉쇄 기간에도 열심히 자료를 만들며 재택근무를 했는데,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에 대화방을 확인하면 이미 수백 수천 개의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그걸 또 하나하나 다 확인하느라 눈이 아팠고, 대화방에 중국인들이 쓰는 최신 유행어나 줄임말이 올라오면 그게 뭘까 추리해 내느라 또 너무 괴로웠다.
5월이 되자, 아파트 단지 내에서의 산책은 허용되었다. 마치 독방에만 갇혀 있어야 했던 억울한 죄수에게 감옥 뜰에서의 산책까진 허용해 주는 것 같았는데, 그마저도 감사했다. 공구 시스템도 자리를 잡아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다양해졌다. 자유가 박탈된 5월의 하늘은 심하게 예뻤다. 겨울옷, 기껏 얇아야 초봄 옷을 입은 상태에서 봉쇄가 되었는데, 봉쇄가 해제되고 나니 6월 여름이었다. 잃어버린 나의 2022년 봄.
반년 만에 받은 이삿짐
문제는 내가 한국에서 중국으로 1월에 보낸 이삿짐이 코로나로 물류가 막힌 탓에 5개월 만인 6월 25일에야 도착했던 것. 봉쇄가 해제되고도 몇 주 후에 받은 이삿짐을 다 정리하고 나니 한국을 떠난 지 반년이 지나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부임지인 상하이에 정착하는 데 반년이나 걸린 것이다. 봉쇄 2달 동안 두꺼운 옷으로, 상하이의 때로는 과하게 따뜻(?)한 봄을 버텼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부에서 물자를 주면 뭐하나, 집에 조리용 칼이 없었다. 이삿짐이 금방 도착할 줄 알고 사지 않고 버텼는데 봉쇄가 돼 버린 것이다. 있는 칼이라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안 되는 스위스아미 브랜드의 휴대용 미니 칼·가위·병따개 세트였다. 취 정부에서 대륙의 스케일을 발휘하여 보내준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채소나, 칼질 안 된 닭 한 마리 같은 것들은 칼이 없는 나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대봉쇄 기간에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기약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5월 말이 되자, 갑자기 6월 초부터 봉쇄가 해제된다는 통지가 내려왔다. 나는 상하이 대봉쇄를 겪으며 세 번 놀랐다고 말하곤 한다. 한 번은 4일간 봉쇄한다고 해놓고 수천만 명 상하이 시민을 기약도 없이 2달이나 가둬둔 것에 놀랐고, 두 번째는 그러다가 갑자기 하루 전 통보로 단박에 봉쇄가 해제된 것에 놀랐으며, 마지막은 봉쇄와 해제, 그리고 코로나 방역 통제와 해제가 갑자기 ‘홱홱’ 뒤집히는데도 시민들이 별다른 동요 없이 아무 일도 아닌 듯 순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 놀랐다. 봉쇄하고 통제할 때는 세상 무시무시한 바이러스 취급하다가, 동일한 바이러스에 대해 ‘별것 아니’라며 급작스럽게 방역 해제를 하는데도 ‘그러려니’ 하던 사람들.
그렇게도 태양을 만끽하며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었던 상하이의 찬란한 5월이 올해에도 지나가고 있다. 기약 없는 옥살이의 좌절과 절망이 언제 일이었나 싶다.
한중관계 악화에 불안한 기업들
그동안 중국에선 20차 당대회와 양회가 있었고, 이곳에서 체감하는 한중 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최근 한국에 다녀온 지인들은 한국 내 각계각층의 반중·혐중 감정이 수교 이래 가장 심각한 수준이라고 전한다.
이곳에서 인터넷으로 접하는 한국 언론의 중국 관련 기사 댓글에서도 일부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반지성주의가 느껴지는 댓글 홍수 속 ‘그래도 중국은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웃이다’ 등 그나마 객관적인 의견이 나오면, 그 밑엔 어김없이 온갖 저주와 욕설로 버무려진 대댓글이 난무한다.
최근 중국은 한국 상품의 통관을 까다롭게 하고, 한국기업과 협력 시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를 자국 기업에 보내고 있으며, 한국 상품을 취급하지 말라고 구두 지침을 내리고 있다.
양국 관계가 이러한데, 한국은 대중국 수출을 늘리려 하고 중국 각 지방정부에선 한국 등 외자기업들로부터 투자를 받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중국에 진출한 친애하는 우리 기업들은, 양국 관계에서 오는 이러한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내야만 한다. 그들은 미중 갈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전 방위적 무한경쟁의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각자의 실적 압박 속에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양국 간 이슈와 공방이 오갈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한다고 한다. 이 ‘철렁철렁’은 우리 진출기업뿐 아니라, 한국 상품을 수입해서 중국 전역에 유통해 주는 중국인이나 동포 사업가들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맘에 안 든다고 이 시장을 소홀히 할 순 없다. 중국의 중산층 소비 규모는 2020년에 이미 미국을 앞질렀고 글로벌 자산 상위 10% 인구가 가장 많은 최고의 시장이며, 전통 제조업과 글로벌 수준의 최첨단 기술을 함께 가진 최고의 공장이자 브레인이다. 그 대체지로 많이 언급되는 인도가 지금의 성장세를 유지하더라도 70년 후에야 중국 GDP를 추월한다는 IMF 전망도 나왔다.
늦기 전에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이 순간 우리에게 닥친 ‘현실’은, 수출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고, 중국이 우리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국가이며, 지금 우리는 강대국일수록 상대국에 대해 뭔가 맘에 안 들면 거침없이 경제 조치를 가하는 시간 속에 산다는 건데, 이미 중국은 경제보복으로 보이는 조치들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정확한 증상 파악이 되어야 정확한 진단과 효험 있는 처방이 나온다. 팩트 파악이 되었으면 이제 원인 진단과 처방이 나올 차례다. 지금 이 세계엔 절대선 국가도 절대악 국가도 없고 다들 자국 이익만을 무한 추구한다. 우리도 좋든 싫든 감정은 뒤로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더 늦으면 너무 늦다.
문득, 우리 기업의 수출 지원과 중국시장 진출을 돕는 것 외에, 안 좋아져 있는 양국 관계의 회복을 위해 민간 차원에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보자 했던, 지난해 부임했을 때의 그 다짐을 꺼내어 본다. 이제 다시 뛰어보자. 누구를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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