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공기업에서 전도가 유망한 친구였는데, 임금피크 적용을 받아 아예 보따리를 싸게 되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집에 있기 뭐하니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내밀었지만,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1억 대 후반의 급여를 받았던 그가 차디찬 세상을 만만하게 본 것이다. 나름대로 회계 전문가로 실무지식과 다년간의 경험으로 무장했지만, 새로운 직장을 얻는데 무기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등학교 동창이 경영하는 회사에 회계 담당으로 입사하게 되었으며, 급여는 연간 3000만 원이라고 했다. 건강하고 능력도 자신이 있었지만, 몇 개월 사이에 소위 ‘몸값’은 거의 6분의 1로 줄었다.
퇴직 후 새로운 직장에서 대폭 낮아진 임금으로 일자리를 이어가는 것을 ‘신임금피크제도(자발적 임금피크제도)’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일할 수 있어 얼마나 기쁘냐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재취업은 그래도 운이 좋은 케이스다. 50대이나 60대 초반에 회사 문을 나서면 그야말로 광야가 펼쳐진다.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친한 친구에게 찾아간다고 전화해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는다. 어렵게 만난 친구는 재취업 알선 이야기가 나오자 밥이나 먹고 가라고 말을 막는다. 가능성 없는 이야기를 선제적으로 가로막는 압박이다.
다시 만나 어렵게 경력과 능력을 자랑하자 말로 하지 말고 글(이력서)로 써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분위기는 마지못해 보기는 하겠지만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력서를 작성하고 자기소개서를 자판으로 치면서 ‘왜 이리 쓸 것이 없는가?’를 절감하며 스스로 좌절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가 CEO라도 나를 고용하지 않겠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것이라는 냉정한 자평이 내려진다고 고백했다.
나름의 기술이나 특기가 있으면 재취업은 쉬워지지만, 금전적으로 제대로 된 보상은 포기해야 한다. 호텔에서 일한 유명한 셰프도 정년에 도달하면 임금을 대폭 낮추는 조건을 수용해야 직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럴싸한 주방장 등 타이틀도 내려놓아야 한다. 시간적 여유가 좀 더 주어지는 장점이 있지만, 하루아침에 직위가 역전되기 때문에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한다.
시설이나 기계를 다루는 기술직이나 단순 노무직은 정년퇴직 후에 최저임금에서 약간 덧붙인 금액으로 재취업하는 붐이 형성되고 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노하우가 많고 기계를 잘 아는 사람을 아주 낮은 임금(통상 기존 직장의 2분의 1 이하)으로 붙잡을 수 있다.
자격증을 갖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면 65세까지 늘어난 근속연한이 이제는 70세로 향하고 있다.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경험이 많고 임금까지 저렴하니 CEO들이 선호한다.
재취업의 목적은 생활비 보전과 상당 부분 관련되어 있다. 특히 4대 보험을 통해 실직에도 대비하고 높은 건강보험료로 연결되는 지역가입자를 피하려는 의도도 있다.
집 한 채와 차량 1대만 있어도 수십만 원을 훌쩍 넘기는 지역 가입 건강보험료를 월급쟁이라면 수만 원대에서 방어할 수 있어 최고의 효율을 자랑한다. 최근 엄격해지고 있지만, 부인과 노부모도 피부양자 명단에 덤으로 올릴 수 있다. 기존처럼 직장생활하는 자녀에게 슬그머니 이름을 올리던 관행에 철퇴가 가해지면서 건강보험료 해결을 위해 직장을 다닌다는 중장년층이 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임금 수준과 관계없이 직장을 가져야 하는 또 따른 이유는 건강관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로 출근하는 것은 건강관리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곳에서 지인을 만나고 교류하는 것은 스트레스는 해소는 물론 삶에 대한 근력을 키워 건강한 노년으로 향하는 데에 디딤돌이 된다.
50대 중반을 넘겼다면 이제는 급여보다 지속적으로 시간을 보낼 일이 우선이다. 자녀가 결혼할 때 ‘현직’이라는 타이틀은 자존심을 드높여 주는 디딤돌은 덤이다.
민영채 | W커뮤니케이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