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 중고차가 중앙아시아 2개 국가를 경유해 러시아로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가 5만달러(약 6천600만원) 이상 승용차를 수출금지 품목으로 정하는 등 국제사회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는 상황에서 '우회 수출'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16일 자동차 업계와 중앙아시아 현지 소식통 등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으로 수출된 국산차들이 러시아로 다량 흘러 들어갔다. 대다수는 중고차로 알려졌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최대 도시인 알마티, 비슈케크에서 주로 통관을 거친 중고차 대부분은 트럭에 실려 러시아에 유입됐으며, 일부 자동차는 철로를 통해 이송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종 목적지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와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지목됐다.
작년 한 해 두 국가에서 러시아에 들어간 한국산 차량은 최소 수천 대, 많게는 수만 대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 수출된 한국산 중고차 70∼80%가량이 러시아 영토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서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카자흐스탄에는 중고차 1만3천347대, 키르기스스탄에는 5만905대가 수출됐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2021년만 해도 국산 중고차 수출 물량이 4천대밖에 되지 않았으나, 2022년 9천388대로 늘더니 작년에 1만대를 넘어섰다.
키르기스스탄으로의 중고차 수출 역시 2021년 4천490대에서 2022년 2만3천112대를 기록한 뒤 작년에 5만대를 돌파했다. 키르기스스탄으로 중고차 수출 물량이 급증한 것은 카자흐스탄보다 관세가 더 낮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생산된 신차 일부도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을 경유해 러시아로 유입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러시아의 지난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후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제재가 시작된 이후 두 나라로 신차 수출 대수 역시 급증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 수출된 국산 완성차는 각각 2만9천297대, 500대로 집계됐다. 이는 2022년 수출 물량 2만1천336대, 189대와 비교해 각각 37.3%, 164.5% 증가한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인 2021년과 비교하면 수출 물량은 카자흐스탄 65.6%, 키르기스스탄은 700% 넘게 급증했다.
직접이든 우회 경로를 거치든 러시아로의 국산 승용차 수출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정부는 작년 4월부터 수출 통제 대상을 '5만달러가 넘는 완성차'로 정한만큼 그 가격대 이하 차량 거래는 가능하다.
하지만 작년 4월 이후 러시아에 유입된 한국 완성차 가격이 대당 5만달러가 넘는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실제 지난해 러시아에 유입된 한국산 차량 중 비교적 고가의 스포츠유틸리티차(SUV)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로 재수출될 경우 웃돈까지 붙어 팰리세이드의 경우 8천만∼9천만원대 거래가 이뤄진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 수출한 것처럼 꾸민 뒤 운송 과정에서 수취인을 바꿔 러시아로 우회 수출한 한국인과 러시아인이 세관 당국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번 적발을 계기로 두 나라가 이미 수출 우회 통로가 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됐다.
한 외교 전문가는 "수출 통제 대상인 국산 자동차가 제3국을 경유해 러시아로 유입될 경우 법적 측면에서 문제 삼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대러 제재 품목을 철저히 후속 체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관련 부처는 부담감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우회 수출을 통한 대러시아 제재의 허점이 노출됐다면 이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이 사안과 관련해 최근 수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국내 업자가 중앙아시아에 수출한 차량이 러시아로 유입될 경우 해당 업자는 대외무역법 위반 혐의로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산업부는 작년 12월 대러 수출 통제 대상 품목을 5만달러 이상에서 배기량 2천㏄ 이상 중대형 승용차로 변경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행정 예고했다.
이 조치가 실제 이행되면 러시아에서 인기가 있는 SUV 모델 현대 투싼과 싼타페, 기아 쏘렌토와 스포티지 등이 수출 금지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정부 관련 부처는 해당 개정안의 이행 시점 등을 심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