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림방적하노이

kimswed 2008.06.22 03:31 조회 수 : 4382 추천:929



치밀한 입지조사와 장기적인 안목으로 현지화에 성공한 (주) 방림 기업개황 기업명 (주)방림   (현지법인명: 방림네오텍스(주)) 진출지역 베트남 푸토성 벳찌 진출년도 1993년 투자형태 단독투자(합작투자에서 단독으로 변경) 투자규모 8,000만불 주요품목 원사 및 직물을 생산 종업원수 1620명(주재원 20명, 현지인 1600명) 홈페이지 www.pangrim.com ㅇ 1963년 창립하여 방적,제직,염색,날염 그리고 가공을 포함한 통합된 일관 생산 공장을 갖추고 면과, 면혼방, 린넨, 레이온, 폴리노직, 텐셀, 폴리에서터, 나일론 및 신축성 직물등 광범위한 유행 제품 등을 원면상태에서부터 최종 가공까지 자체시설을 통하여 생산하고 있다. ㅇ 현재 일본, 독일 ,홍콩, 미국 등 세계 각 지역에 사무소를 개설하여 신시장 개척에 앞장서고 있으며, 생산비용 극소화를 위하여 베트남을 중심으로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 시장현황 베트남의 섬유∙봉제 산업(T&G)은 원유에 뒤이은 베트남 제2의 주요 수출품목 산업으로 주요 산업분야 중 하나이며, 무역부(MOT)자료에 따르면 섬유∙봉제 산업은 수출액 2억불 이상, 평균 증가율 17%인 5대 산업 분야(원유, T&G, 신발 및 가죽, 목제, 전자 제품) 중 하나에 속한다. ∎ 생산성 - 섬유 : 연간 섬유 생산 150,000 톤, 1,050,000 롤러 - 직물 : 매년 직물 생산 5억 미터 이상. - 니트 : 연간 생산량 70,000톤 - Complete dying : 연간 3억 8000만 미터 - 타월 : 연간 타월 25,000 톤 - 의류 : 연간 생산 5억만. 2006년에 베트남이 WTO 회원국이 되면서 쿼터 제한 폐지에 대한 특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다국간 섬유 협정(MFA)이 단계적으로 폐지됨에 따른 이익을 기대할 수 있어서 WTO 가입 이후, 미국으로의 베트남 섬유∙봉제 수출이 연간 20-25% 증가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WTO 가입으로 인해 그 동안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한 저가의 저 품질 제품도 경쟁력이 있었으나 향후에는 자유경쟁체제로 돌입하게 됨에 따라 품질 향상에 주력해야만 지속적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정부에 의해 승인된 섬유∙봉제 산업의 장기 개발 전략 > 항목 2005 2010 면섬유 30,000 톤 80,000 톤 합성 섬유 60,000 톤 120,000 톤 실크 8억 sq.m 14억 sq.m 니트 3억 pcs 5억 pcs 의류 7억 8000만 pcs 15억 pcs 수출액 40-50억 불 80-90억 불 근로자 고용 근로자 250-300만 명 고용 근로자 400-450 만 명 국내 원·부자재 사용 비율 50% 이상 75% 이상 자료원: 섬유의류협회(Vietnam Textile & Apparael Association)                   베트남섬유공사(Vietnam Textile & Garment Corp)             진출과정 및 사업성과 연 도 내                    역 1993 베트남 북부 푸토주 벳찌지역에 “방적 및 제직 공장” 설립 1995 同지역에  “ 신규 염색 및 가공공장” 설립 2003 베트남 정부로부터 수출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GOLDEN DRAGON" 상 수상 2004 社名을 “ 방림유창”에서 “방림 NEOTEX"로 改名 2005 가공설비 추가 투자( 비연속 부문) 2006 우수 섬유업체 주어지는 “ 공업부 장관상” 수상 2006 직기 증설투자및 최신 정방 시설 투자 완료 (US $ 1,000 만불 규모) 한국의 섬유산업이 고비용 구조 및 인력난의 심화 등으로 경쟁력 약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1990년대 초 한국의 (주)방림은  섬유산업의 노동집약적 특성을 고려하여 중국, 우즈베키스탄 및 동남아등지에 생산기지이전을 모색하였다. 당시 한국의 여타 섬유업체와 마찬가지로 방림도 중국을 투자유력지로 고려하였으나  섬유봉제와 달리 원사 및 직물을 생산하는 당사와 같은 업종은 대규모 장치산업으로  해외이전 시 최소 10년 이상은 안정적으로 생산 할 수 있는 여건이 유지되어야 하는 점을 비중 있게 고려하였으며,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베트남이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뿐 아니라 베트남 정부의 외국투자기업에 대한 적극적 유치정책 및 저렴한 가격의 장기토지임대 및 세금감면 혜택 등에 힘입어  1992년에 베트남 하노이 북부의 푸토성 에 공장설립을 결정하게 된다. 이듬해 1993년 방적 및 직포공장설립을 시작으로 하여 1995년에는 한국에서의 축척된  기술과 설비를 바탕으로 한 연간생산규모 3,500만 야드에 이르는  새로운 가공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1995년 가공공장 설립이후 초기투자자금의 과도한 부담 및 품질향상의 한계, 그리고 현지영업의 부진 등으로 초기 수년간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지생산에 대한 경험이 축척되고  한국의 공장에서 운영해온 선진화된 생산기법, 인사관리, 품질관리기법등이 현지 생산근로자들에게 잘 숙지되면서 한국생산제품과 비교 시 손색이 없는 베트남공장의 현지화를 3 년 여 만에 이루게 된다. 이와 더불어 다양한 신제품의 개발 및 신시장의 개척에도 성공하여 2002년부터 는 5년 연속흑자경영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2006년에는  초기 투자차입금인 US$7,200만 불에 대한  상환도 완전히 마무리하게 된다. 이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2003년에는 베트남정부로부터 외국계업체로서 가장 수출을 많이 한 5개업체중 하나로 선정되어  영예스러운 GOLDEN DRAGON상을 수상하게 되었으며 2006년 9월에도 베트남 전체 섬유업체중  42개의 우수기업에 선정되어 공업부 장관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2006년에는 그동안 한국의 구미공장에서 가동하였던 신 정방 설비 및 AIR JET직기를  이곳에 완전히 이전함으로  보다 향상된 품질의 제품을  자동화한 설비에서 생산 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된다. 향후 방림베트남공장은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여 향후 PRINT설비투자, 좀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 할 수 있는  최첨단 가공설비 등에 꾸준히 투자할 계획이며 유럽의 선진섬유기업과도 PARTNER관계를 구축하여  앞선 서구의 기술에 대한 기술이전 및 신제품의 공동개발 및 시장진출의 확대 등 외부와의 과감한 제휴 을 통해서 전문화된 공장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다져나갈 계획이다. 성공 요인 품질안정과 경쟁력확보를 염두에 둔 VERTICAL MILL의 구축 양질의 가공 직물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원사, 제직, 염색가공”이 동일수준의 품질 관리 기준 하에 이루어져야한다는 일념 하에 초기투자비용의 과도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투자 시 과감히 일련 생산 공정이 가능한 “방적, 직포, 가공공장”을 설립 한 것이 안정된 제품을 생산 할 수 있는 현지화 공장에 성공한 가장 큰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일련 생산 공장을 갖춤으로서 의류시장에서 점점 더 중요도가 높아가는 신제품의 개발 및 단기납기의 요구에도  유연하게 대처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양질의 노동력과 장기적 안목을 본 공장부지의 선정. 앞서 언급한 대로 섬유산업은 노동 집약적 산업으로 양질의 노동력확보 및 임금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제품의 가격경쟁력확보에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측면에서 방림이 초기투자당시 조건이 좋은 중국을 선택치 않고 베트남의 북부외곽지역에 투자 한 것은  현재의 변화된 중국의 환경(=지속적인 임금의 과도한 인상 및 동부해안지역의 도시화에 따른 중국정부의 공장 이전 요구 등) 과 비교 해 보면 현명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베트남은 2006년에 외국기업근무 근로자의 경우 최저임금이 새롭게 아래와 같이 인상되었지만  많은 한국기업이 진출한 중국의 현재평균임금과 비교시 여전히 많은 차이가 있으며, 노동의 질에 있어서도 이직률이 낮고 일에 대한 숙련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리고 방림베트남공장의 경우 염색가공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좋은 품질의 用水源이 되는 홍 강 을 배후에 둔 것도 성공요인으로 판단된다.    A군 (=하노이,호지민대도시내 활동기업)      :  870,000VND (=약US$55)    B군 (=하이퐁,꽝닝,동나이등 도시내 활동기업) : 790,000VND (=약US$50)    C군 (=A,B군을 제외한 모든지역)             : 710,000VND (=약US$45) 생산제품의 집중화 및 전문화 과거 방림이 한국에서 생산 할 때처럼 시장의 많은 요구에 모두 부합하는 백화점식의 다양한 제품의 생산에서 탈피하여 현지의 설비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으면서 차별화 할 수 있는 제품의 생산에 주력함. 특히 섬유일반제품은 중국의 저가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미국, 유럽,일본의 기능성소재를 요구하는 Uniform 및 Working wear Market에서 Buyer의 요구조건에 맞는 맞춤제품을 생산함으로서 부가가치의 증대 및 차별화에 성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안정적인 ORDER수주확보에도 기여 할 수 있게 된다. 한국 관련기업의 유치 및 현지화 노력 섬유산업의 경우 관련기업이 한곳으로 모여야만 더욱 더 경쟁력을 확보 할수있는 바탕이 된다는 일념하에 초기투자당시 아무런 한국기업이 없던 베치지역에 푸토성 지방정부의 도움을 받아 공단지역을 조성 하게하고, 한국의 섬유관련 중소기업들에게 꾸준한 유치 권유활동을 함으로서 지금은 40 여개의 한국섬유관련단지가 형성되는 성과를 이루게 되어 현지화의 성공뿐 아니라 관련기업들이 상호 시너지 효과를 보고 있다. 시사점 신중한 검토를 통한 조기 투자가 투자 효과 극대화 해외 이전 검토시 최소 10년 이상은 안정적으로 생산 할 수 있는 여건이 유지되어야 하는 점을  고려하여,  그 당시 투자지로 가장 인기있던 중국 대신에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는 베트남에 투자를 결정하였다. 또한 투자 당시가 베트남 정부가 외국인투자 유치를 시작한 초기라 베트남정부로부터 저렴한 가격의 장기토지임대 및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받아 비용의 최소화와 투자효과의 극대화를 이룰수 있었다. 현지 지방정부와의 밀접한 관계 유지 및 현지화 노력이 지속적인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 정부의 권한이 막강한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현지 지방정부와의 협력 관계 형성을 통해 투자 초기의 각종 어려움 극복하였으며, 현지화 노력을 통해 직원들의 자발적인 근로 의욕 고취 및 효율성 제고를 통해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창출하였다.<끝>

 

경방, 베트남에 섬유 원료공장 건설

경남, 빈증 성에 50ha의 부지를 빌려 베트남의 베카멕스 산업개발과 합작으로 섬유제품 원료공장 건설계획 (4단계에 걸쳐 1억 6천만 달러가 투자, 올해 착공해 빠르면 내년 중 준공 예정) 발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섬유회사인 경방은 1일 베트남에 섬유 원료공장을 설립한다. 경방은 1일 베트남 남부 호찌민시 인근의 빈증성에 50ha의 부지를 빌려 베트남의 베카멕스 산업개발과 합작으로 섬유제품 원료공장을 짓는다.

이 프로젝트는 모두 4단계에 걸쳐 1억 6천만 달러가 투자될 계획인데 우선 경방은 1단계로 4천만 달러를 들여 원사와 원재료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1단계 공장은 올해 착공해 빠르면 내년 중 준공할 계획이다. 현재 베트남에는 수교 직후인 1992년부터 방림방적을 비롯 충남방적, 신원, 한세 등 국내 유명 섬유, 의류업체들이 진출해 베트남의 섬유·의류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좋은인연만들기

글 : 호치민 북클럽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살다 보면 경쟁이란 것을 안할 수가 없는데, 사업 씩이나 하면서 적을 만들지 않겠다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린지 모르겠다. 유능할수록, 하는 일이 잘 되면 잘 될수록,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훼방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또, 적이 생겨난다는 것은 해당 분야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는 뜻도 된다. 물론 이때 처신하는 방법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르고 환경과 능력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에 대한 처세법을 기술할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못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에, 우리 부서 바로 옆 부서에 입사 동기들이 한무데기 근무했다. 왜 나만 홀로 이 부서에서 근무하고 친구들은 왜 저기서 같이 근무하게 되었을까가 다 궁금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부서가 추진하던 사업이 하나 둘 완료가 되면서 그 많던 동기 녀석들이 각자 다른 부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남아 있어야 했는데, 그 부서에 남게된 하나 밖에 없는 입사동기 녀석과 가깝게 지내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석에게 좋은 쾌가 생겨 이직을 하게 되었다. 담당 업무 분야에서 어떤 회사가 그 녀석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하여 직장을 옮기게 된 것이다. 그 녀석의 퇴직을 2~3일 앞두고, 아쉬운 마음에서 개인적인 환송회를 해주고 싶었다. 말이 환송회지 그냥 마지막으로 소주잔을 같이 기울이는 것이고 그게 작별인사가 된다는 것이 전과 다를 뿐이었다.

그날은 좀 많이 마셨다. 평소에도 많이 마시는 편인데 그날 따라 더 마셨다. 그런데 아직 자리가 파하지도 않았는데 그 녀석이 술잔 내려 놓더니만 대뜸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따라 나와!” 이러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술 값 치루고 밖으로 나갔는데, 이녀석이 인적이 드믄 회사 주차장으로, 다시 그 옆에 반쯤 올리다만 신축건물 안으로 날 데리고 가더니 인정사정 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무슨 설명도 없었다. 욕설과 함께 무작정 날아오는 발차기는 피할 수도 없었다. 너무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녀석이 그동안 나한테 서운한게 많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덜 맞아야겠고, 급소도 피해서 맞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며 낮게 웅크렸다. 그런데 이녀석은 술은 마시는 시늉만 했는지 방방 날아다니면서 나를 발로 차대는 것이었다. 돌려차기, 날아차기, 옆차기, 앞차기.. 등등 홍콩 무술영화에서 봤던 것은 이 날 밤에 다 봤다. 그 녀석은 내게 멱살이라도 잡히면 싸움이 만만치 않게 될 것이 뻔하니까 멀찌 감치서 발로 차 대기만 했다.

얼마나 오래 맞았는지 그 건물에 순찰도는 경비원이 싸움을 말려주었다. 싸움도 아니다.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경비원이 우리를 목격하고 “지금 당장 건물에서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 라면서 후라시를 비추며 외쳤는데, 황당한 것이 그 소리 듣자 마자 내게 이소룡 흉내를 내던 그녀석이 발차기를 멈추고 “제발  경찰에 신고하지 말아다오” 이러는 것이다. 실컷 두들겨 패 놓고 책임져야 할 판국이 벌어지게 생기자 다시 또 절친한 친구사이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다. 물론 나는 누구한테 맞기는 많이 맞아봤어도 경찰에 신고했던 적은 한번도 없다. 그래서 일단 신고는 안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자려고 누웠는데, 그녀석 발에 걷어차인 몸뚱이 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 ‘왜 그랬을까? 뭐가 그렇게 나한테 서운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밤새 뒤척였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해서 보니 그 녀석이 자리에 없다. 아직 퇴직일 까지는 하루 이틀 남았는데 자리를 비운 것을 보니 어제 무리를 하긴 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녀석한테 이 회사에서는 이제 막판인데 자신의 근태에 별로 신경을 안쓰나 보다 했다. 나는 어제밤 신나게 두들겨 맞는 바람에 학생 때 앓았던 늑막염이 재발했다. 늑막염은 한번 걸리면 완치되어도 쉽게 재발한다. 재발을 막는 방법은 신체를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이날 이후에도 몽골에서 케이블 공사를 할 때에 사무실과 수백키로 떨어진 현장을 다니느라 ‘자이루스’라는 사람 타라고 만든거 같지 않은 러시아제 야전 찦차를 타고 다니다가 늑막염이 재발했던 적이 한 번 정도 더 있다.

아무튼, 점심 때가 되어 지하 구내 식당엘 내려 가는데 식당 입구에서 그녀석과 마주쳤다. 놀랬다. 갸가 오른발 잡이란 건 그날 밤에 맞으면서 알았는데 발목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나타난 것이다. 맞은 건 난데 치료를 받은 건 그 녀석이라니 무술가 치고는 아마추어도 웬간히 아마추어구나 하는 생각이 다 들었다.  “야, 너 발 왜 그래?” 라고 물으니까 그녀석이 한다는 소리가 “너 때문이야, 새꺄, 깽값(치료비) 줘” 이러는 것이다. 가소로와서 말도 안나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다른 직장동료들의 질문을 애써 무시해 가며 식사를 마치고 그날은 그렇게 보냈다.

그 녀석이 회사를 옮겼다. 안보이게 된 것이다. 그냥 그런 일상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정보통신부에 근무하던 학교 선배가 황당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송xx가 새로 옮겨간 회사에서 무협지를 써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 녀석, 내게 술을 잔뜩 취하게 만들어 놓고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놓고선 마치 대단한 격전이라도 벌여서 싸워 이긴 것 처럼 ‘뻥’을 치고 다닌다는 것이다. 내게는 개망신인 그 스토리가 당시 근무하던 회사에서 공장 연구소 할 것 없이 전사에 퍼졌던 것 같다. 그 녀석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 무협스토리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정말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어쩌나? 회사가 월급을 주는데.. 하하하.

세월이 조금 흘렀다. 그 녀석이 근무하던 부서는 사람들이 이직도 잦았고 타 부서로 전근도 잦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1년에 한번 정도 전에 근무하던 사람들, 이른 바 OB들도 모이는 회식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붙임성 좋은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해서 다른 부서 회식에도 별 거부감 없이 잘 쫓아다녔다. 그 때 별 생각 없이 OB들이 모인다는 그 부서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뜻하지 않게 그 녀석을 만났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몸무게가 반으로 줄어보였을 만큼 말라깽이가 되어 있었다. 그 녀석, 이직이 실패하여 피씨방도 차려보고 재취업도 시도해보고 별짓 다해 봤다고 한다. 풀이 얼마나 죽어 있었는지 그녀석한테 그동안 감정이 안좋았던 것도 내색 한 번 못했다.


그 녀석
, 그날 그 부서 부장한테 복직을 시켜 달라고 애걸복걸 수준으로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장은 콧방귀도 안뀐다. 그랬더니 작전 바꿔서 부서에서 제일 막내인 여직원한테 자기편을 들어달라는 눈치를 보낸다. 여직원 반응도 냉랭하다. 그러더니 부서원 가운데 누군가가 그 녀석과 내가 싸웠던 이야기를 농담 삼아 꺼냈다. 사람들은 그 녀석의 무협지 스토리 때문에 나와 그 녀석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고 회사 안에서 내 행실이 그렇게 처절한 ‘응징’을 당해야 할 만큼 나쁘지도 않았기에 그날 그 녀석의 복직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2~3년쯤 후에 내게도 회사를 옮기는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현명한 처사는 아니었지만 그당시만 해도 나 역시 창업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거대 이통사에 납품선이 생긴 내 바로 윗 상관인 과장이 회사를 하나 만들며 나도 같이 데려간 것이다. 당연히 과장은 사장이 되었고 나는 그 회사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큰 회사는 아니다. 새로 생긴 회사인 만큼 해야 할 일도 많았고 번잡스러웠다. 하루하루가 바쁜 일상에 부지런히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어느 날 회사로 전화가 한통화 때르릉 걸려왔다. 받아 보니 많이 듣던 목소리였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 녀석이었다. 사장님 계시냐고 묻길레 계신데 바꿔 주랴? 하고 되묻자 그냥 됐다면서 끊어버렸다.

아마도 우리부서 과장이 회사를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입사 청원이라도 해볼 량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내 목소리 듣고 그냥 제풀에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부탁하려다가 역시나 내가 걸림돌이라고 여겨서 시도 조차 못했던 것일런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던 그 녀석과의 인연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마주칠런지는 알 수 없어도 그 녀석과는 그렇게 끝이 났다. 만일 그 녀석이 그날 밤에 나를 그렇게 두들겨 패지 않았고, 또 그랬어도 엉터리 무협 스토리를 동네방네 퍼뜨리지만 않았어도 그 녀석 인생의 진로가 약간은 다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그 녀석이 왜 그렇게 나를 속으로 미워했는지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대강 어렴풋이 짐작 되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직장생활하는 사람들을 지금은 ‘넥타이 부대’라고들 부르기도 하지만 한 때는 ‘백로’라고도 했다. 항상 흰 와이셔츠 차림의 정장이었기 때문에 붙었던 별명인데, 요즘은 아무리 경직된 근무분위기의 회사라고 해도 흰 와이셔츠만을 고집하는 회사는 드믈다. 하지만 90년대 초중반에 회사들은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흰 와이셔츠만 입게 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온통 흰색 와이셔츠 투성이의 근무복이었는데, 신입 시절에 하루는 모른 척하고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고 갔었다. 아무일도 안생겼다. 걍 사람들은 ‘저놈이 아직 애 티가 팍팍 나는구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몇일 안있어서 훗날 날 두들겨 팼던 송가가 나 처럼 색깔 있는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을 했다. 나는 그날 하루 왼종일 그 녀석이 지네 부서 부장한테 복장 때문에 야단 맞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리 부서 부장은 신입사원인 내가 아직 젊고 학생티를 벗지 못한 것을 오히려 강점으로 생각해주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흰머리가 있어서 정수리에 새치가 한웅큼인데, 이게 멀리서 보면 머리에 뭐가 묻은 것 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 부서 부장은 내게 그 새치를 그대로 그냥 두지 말고 염색을 하고 다니라고 권했었는데, 색깔이 검은 색이 아닌 노랑색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다니던 회사가 실권자 한 둘이 회사를 좌우하는 아담한 회사였나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근무할 당시만 해도 30대 기업안에 드는 어느 대기업 못지 않게 큰 회사였는데 지금은 그 때 보다 몸집이 더 불어 있다.

그 녀석은 아마도 그런 것이 눈에 거슬렀는지 모르겠다. 한 쪽은 신입사원이 귀한 부서에 들어가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온갖 응석과 재롱을 부려도 오냐 오냐 받아주는 분위긴데 자신은 그런 날 흉내만 내도 쌍욕은 아니지만 당장에 험한 소리를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녀석이 하던 소리 가운데 하나가, 여자한테 그렇게도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 여자들한테 복수를 하겠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나는 여자도 아니고, 그 녀석한테 복수를 당할 만큼 그 녀석에게 해꼬지를 한 적도 없지만 그 녀석의 맹목적인 앙갚음 대상에 들었을런지도 모른다.
 

위의 이야기는 그렇게 재밌는 추억거리나 큰 교훈을 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신경쓰면 악연이 되지 않을 일도 쉽게 악연으로 만들고 만다면 이는 바보짓이다. 더욱이 베트남에서 맺은 인연들은 그 시한이 다들 짧다. 새 얼굴 하나 익혔는가 하면 어느새 그 얼굴은 나와 멀어진 얼굴이다. 돌아서면 험담을 해야 하는 안좋은 인연으로 바뀌는 일이 보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러 험하고 외로운 외국생활을 하면서 같은 한국사람 만나기를 꺼려 하기도 한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조금 오래 묵었다 싶은 사람들 가운데 몇은 주머니에 돈이 두둑히 들어 있을 것 처럼 보이는 사람들과만 새 인연을 맺고 싶어한다. 이런 인연이 결코 오래 못가는 인연이다.
 

좋은 인연들 만드시라! 불가에서는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대로,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일대로, 업은 짓는대로 쌓인다고 한다. 지금 이뤄 놓은 남 좋은 일(남을 이롭게 하는 일) 하나가 언젠가 생각지도 못한 보답으로 자신에게 되돌아 올 수도 있다.  
 
 

<호치민 북클럽 : yi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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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골프카페 file kimswed 2661 2008.12.18
55 글/이창근 file kimswed 2340 2008.11.25
54 석유공사 Vietnam file kimswed 2562 2008.11.25
53 불투명한 베트남경제 file kimswed 2198 2008.11.25
52 묻지마 베트남결혼 file kimswed 2993 2008.11.20
51 베트남의오늘과내일 file kimswed 3445 2008.11.17
50 한국여성골프 file kimswed 2495 2008.11.13
49 골프주기도문 file kimswed 2830 2008.11.13
48 구찌탐방 file kimswed 2778 2008.11.10
47 나짱기행 file kimswed 3150 2008.11.10
46 한국인의골프실력 file kimswed 3237 2008.11.04
45 붕타우리조트 file kimswed 3660 2008.11.03
44 메타바이오메드 file kimswed 3724 2008.10.31
43 베트남도둑 주의보 file kimswed 2937 2008.10.30
42 베트남꽃뱀주의보 file kimswed 3782 2008.09.17
41 베트남은행대출 file kimswed 3089 2008.09.15
40 commonwealth bank file kimswed 2952 2008.09.01
39 베트남골프장 file kimswed 3796 2008.09.01
38 베트남도돈없으면살기힘들어 file kimswed 4025 2007.03.10
37 Kim & Kim file kimswed 2429 2008.08.21
36 영빈관 file kimswed 2543 2008.08.10
35 외국인주택소유법 file kimswed 3037 2008.08.06
34 베트남부동산법 file kimswed 3256 2008.07.10
33 광우병 file kimswed 3020 2008.06.25
» 방림방적하노이 file kimswed 4382 2008.06.22
31 SK 에너지 file kimswed 3175 2008.06.16
30 글/배연해의 沈香 file kimswed 3149 2008.06.11
29 글/한영민의망각의강 file kimswed 3191 2008.06.09
28 글/이칭근의짝퉁 file kimswed 4041 2008.06.05
27 잘못된베트남부동산가격 file kimswed 2930 2008.06.05
26 베트남한인회 file kimswed 2954 2008.05.18
25 글/CBS강인영 file kimswed 2846 2008.05.18
24 글/박원순 file kimswed 3074 2008.05.10
23 글/신정원 file kimswed 3215 2008.05.04
22 베트남현대 file kimswed 3700 2008.05.01
21 ConDao file kimswed 3386 2008.04.19
20 동아건설 file kimswed 2894 2008.04.14
19 글/이홍배 부동산규제 file kimswed 2613 2008.04.14
18 하노이경마장 file kimswed 3265 2008.04.12
17 럼동 골프장 file kimswed 2746 2008.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