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상덕

kimswed 2009.06.27 11:24 조회 수 : 1336 추천:288



호국보훈의 달 특별 인터뷰

전쟁을 3번이나 겪은 차 • 상 • 덕 호찌민 노인 연합회회장

한국을 수렁에서 건진 우리의 선열들과 우방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잊지 말자.

호국보훈의 달, 말만 들어도 차상덕 옹의 눈에는 회한의 이슬이 맺힌다. 전쟁을 3번이나 겪으며 모진 운명을 걸어온 차 상덕 옹, 그는 한국의 가장 험난한 세월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의 증인이다. 그의 증언을 통해 한국의 질곡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대한민국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바쳐진 순국선열들의 넋을 위로해 보고자 한다.

>>> 차 옹의 생애에 3번의 전쟁을 겪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전쟁을 겪으셨는지 말씀을 부탁 드립니다.
제 나이 10대 후반에 일본의 치하에서 대동아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은 지 고작 5년 만에 다시 한국전쟁이 발발했죠. 한국 전쟁은 세계 전쟁사에 유래 없는 잔인한 전쟁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저도 국군으로 참전하여 인민군과 육박전을 체험한 끔찍한 기억을 남긴 전쟁입니다. 그 후 월남에 와서 다시 월남전의 참상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벌써 34년이 지나 이제는 그 아픈 기억이 조금씩 아물어가는데, 최근 한국에는 다시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니 이제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조차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로써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부디 우리민족이 또 다른 불행한 역사를 만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한국 전쟁에 참전 당시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으신지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당시 육군 00 공병 부대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국 전쟁이 발발할 때 저희에게 지급된 무기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구형 소총이 전부였습니다. 총알을 한발 장전하고 사격한 후 다시 또 한발을 장진해야 하는 아주 구형이었죠. 반면에 인민군의 무기는 우리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공냉식 기관총은 물론이고 개인 장비로 따발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구형 소총만이 무기의 전부인 우리 공병 부대로써는 도저히 적과의 대적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남으로 남으로 후퇴를 반복해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구산 초등학교라는 곳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마침 미군으로부터 최신형 M1 소총이 개인에게 지급되고 부대에는 기관총 2문과 60미리 박격포 2문도 함께 지급되어 기본적인 무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초등학교에서 2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515고지가 있었는데 그곳을 점령하고 사수하는 과정에서 공병부대로는 예외적으로 적과 직접 육박전을 벌렸습니다.
그 고지를 탈환하고자 하는 인민군들이 야간을 이용한 공격을 감행 할 때 전방 참호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우리부대는 총 한방 쏠 기회도 없이 인민군과 맞닥뜨렸습니다. 별수 없이 처절한 육박전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칼로 총으로 죽여야 만 내가 살수 있는, 생과 사의 경계가 무너진 지옥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머리에는 사상도 정치도 없었습니다.

단지 다가오는 적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절박감에 정신 없이 총칼을 휘둘러댔습니다. 깊은 산속의 암흑은 귀를 찢는 총성과 가슴을 도려내는 비명소리로 채워졌습니다. 그런 암흑 속에서도 죽음의 공포로 초점을 잃은 채 끊임없이 다가오는 피로 물든 아귀의 눈동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살기 위해 악마가 되어 총칼을 휘두르다 피로 온몸을 다 적시고 기력이 소진되어 이제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체념에 손발이 마비될 쯤에 가쁜 숨소리와 고통을 참는 신음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 기인한 고요를 만났습니다. 적들이 물러간 것입니다.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 전투로 인민군 43명과 아군 6명이 전사 했습니다. 중대의 대부분의 장병은 크고 작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천운으로 저는 큰 부상 없이 목숨을 유지했습니다.
아침에 동이 트고 전장을 정리하며 전사한 인민군을 보니 고작 17-8살의 어린 아이들이 군화도 없이 가마니로 발을 싸맨 상태였고 얼마나 굶주렸던지 하얀 피부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이었습니다. 그 몰골에 양 어깨에 수류탄 2발씩을 차고 따발총을 들고 습격을 한 것인데 왜 그들이 수류탄을 먼저 던지고 공격을 안 했는지 59년이 지난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참호위치를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우리와 조우하게 된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그때 그들이 수류탄을 먼저 던지고 공격을 했다면 우리 부대는 전멸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도와 목숨을 건졌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이미 나의 목숨은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바쳤으니 더욱 용맹하게 싸워 나라를 지켜 이곳 대한민국의 하늘아래 내 뼈를 묻겠노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공병 부대로 적과 직접 육박전을 벌여 대 전과를 올린 우리 부대는 미국의 투르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동상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 부대는 515고지를 보병에게 인계하고 강원도 묵호로 이동하여 원산을 거쳐 함경북도 함흥, 북청, 길주, 그리고 압록강 국경인 해산까지 진격하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거의 통일이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다시 혼란에 빠지고 38선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전세를 유지하다가 결국 휴전을 맞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맺은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한으로 갈려져 56년째를 이어오고 있으니 참으로 기구한 한국의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 한국은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한국은 아직도 전쟁 중에 있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전쟁 종식을 알리는 평화협정이 없는 이상 지금의 평화는 마지못해 유지되는, 마치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 외줄 위에 서 있는 듯한 위험천만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나마 그 외줄 위의 평화라는 질그릇이 최근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거센 바람 앞에 마구 흔들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국민들의 뜻을 한곳에 모아 이 위기에 대처해야 할 때입니다. 

>>> 그런 전쟁이 총성을 멈춘 지 이미 56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그 전쟁의 의미가 현실적으로 실감되지 않습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십시오.
 우리나라는 6.25라는 참혹한 전쟁으로 거의 모든 국토가 폐허로 변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출현과 함께 세계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고도 성장을 이루고 지금은 세계 12대 무역국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전쟁 중에 있는 불행한 나라입니다. 비록 불안하기는 하지만 무려 60년 가까이 총성 없는 평화가 유지되다 보니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이 자리에 있는지 또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평화가 얼마나 가벼운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여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불안하지만 그나마 유지되는 우리의 평화는 수많은 애국자들의 피로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선열들의 뜨거운 피가 우리 삶의 근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일부 젊은이들이 전쟁의 참상도 모른 채 그 전쟁의 원인을 왜곡하고 그 의미를 부정하며 그 당시 우리에게 군대를 파견하여 목숨을 함께 바쳐 우리나라를 구한 우방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리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십만의 국군들과 남의 나라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자신을 산화시킨 우리의 은인에게 결코 해서는 안될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당시 그 전쟁을 겪으며 우리 군과 유엔 연합군이 입은 인적 피해는 사상자와 실종자 그리고 부상자를 포함하여 총 1,146,232명이고 민간인은 남북한이 합쳐 약 3백 6십만 명이 희생을 치렀습니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이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무려 6백 3십 5만 명이나 됩니다 (위의 표 참조). 이런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와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대가를 치르고 지킨 나라에서 여러분이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정말 천운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일어난 전쟁이라고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대가로 지금의 젊은이들이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선열들의 피를 외면한다면 결국 가까운 미래에 더욱 참혹한 또 다른 대가를 젊은이들 스스로 치러야 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각오 없이는 평화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 젊은이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생각이 시대 착오적인 사고라고 치부하며 우리는 당신 같은 구 세대와 다르다고 자부할 일이 아닙니다. 세계는 더욱 냉혹해 졌습니다. 지금의 세계는 60년 전 자유 수호라는 이름아래 우방국가의 젊은이들이 이름도 듣지 못한 나라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만큼 의롭지 않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평화를 위해 아무도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과연 우리는 우리나라의 평화를 지키려고 어떤 노력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자신과 정치적, 이념적 의견이 다르고 지연과 학연이 다르다고 서로를 불신하고 비난하며 국민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한 두 사람의 노력이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의식을 갖고 마음을 모아 함께 노력하고 또 희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한민국의 안녕과 번영이라는 공동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를 피로써 수호하고 땀으로 일으킨 구세대, 여러분들이 보수 골통이라고 비웃는 희생의 세대는 모든 영욕을 뒤로하고 이제 뒷방으로 물러갑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가 나라를 위해 흘린 피와 땀에 대하여 어떠한 칭송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러했듯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후손에게 결코 누구에게 양보해서는 안될 나라의 안녕을 지키는 역할을 다하여 주실 것을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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