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아프리카에 처음으로 출장을 갔을 때, 불에 탄 흔적 그대로 검게 그을린 대형 건물을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불 난 건물을 왜 저렇게 볼썽사납게 흉물스런 모습 그대로 두냐고 현지인에게 물었더니 그 건물은 석유 수출을 담당하는 정부청사인데 최근에 정권이 바뀌면서 이전 정권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정부패를 감추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어도 새로 바뀐 정부에서 불에 탄 건물에 대한 수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아마도 예산부족이라든지 아니면 우리가 잘 모르는 자국 내 정치상황이 원인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남아있는 의문은 여전하다. 뭔가를 감추기 위해서라면 해당 물증 한두 가지만 없애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석유 수출을 대가로 불법적인 잇속을 챙겼다면 관련 문서철 몇 권 불사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왜 일부러 화재를 일으켜 건물 전부를 몽땅 없애려고 했을까? 아마도 자신들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새로 앉을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그 때까지 누려오던 (부정부패를 저지를) 특권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넘겨주기는 싫었던 모양은 아니었는지 싶다. 이는 2003년도 7월 ‘나이지리아’ 제1의 도시 ‘래거스’에서의 일이다. 그 무렵 그 나라에 사상 최초로 무혈 정권교체가 있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신생독립국들이 직면한 정치적 난국은 최소 2개 이상의 부족으로 구성된 다 종족, 다 부족 국가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민주적인 절차는 결과적으로 표결을 통한 다수와 소수의 대결이니 언제나 다수인 종족이 우위를 차지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만일 종족이나 부족 개념이 이미 사라져 버린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국가에서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나, 자기 종족을 제외한 다른 종족은 어디 까지나 자신들과 상관 없는 ‘남’이라는 고정관념이 확고한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어느 종족이던 지배종족이 되지 않는 이상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배려-잇권이 거의 하나도 없거니와, 선거에서의 승패 유무가 부족의 번영과 멸망을 가르는 전환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씨앗이다.
영화 ‘호텔 르완다’에서는 다수 종족인 ‘후투’족이 ‘르완다’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소수종족인 ‘투치’족을 무려 50만 명이나 학살하는 내용이 나온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시체로 가득 찬 도로 한 복판에서 오열하던 모습은 실화가 아니었는지 몰라도 그 길바닥을 메우고 있던 주검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니 인간의 잔혹성에 같은 인간으로서 치가 떨린다. 어디 그뿐이랴, 영화 ‘언더그라운드’ 후반 부에 등장하는 배경인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신랄하면서도 코믹한 영화 내용과는 달리 실제 상황에서는 인종청소가 자행되었다고 한다. 점령지 현지인 남자들은 죽여 없애고, 어린 아이들은 팔 다리를 잘라 불구로 만들어 어른이 되어도 사람 구실을 못하게 만들고, 여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씨앗을 심어놓는 끔찍한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상대인 그들이 우리가 아닌 ‘남’이기 때문이다. 그냥 남도 아닌 우리가 잘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적대적 상대로서 ‘남’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결국 그 ‘남’과 ‘나’를 가르는 기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분별심’이라 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협화음과 불행의 근원으로 삼는다. 그 분별심이 ‘나’인 ‘우리’와 그렇지 않은 ‘남’을 가리기 시작할 때, 그 상대가 세력이 커져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는가 하는 우려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내가 다녀갔던 아프리카 국가 ‘나이지리아’는 세계 12위의 산유국이다. 인구가 좀 많기는 하지만-1억 2천 정도 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열두 번째로 기름이 많이 나는 나라라면 기름 팔아서 생긴 수익금으로 사회 복지혜택 충족시키고, 경제 개발을 위한 재투자를 하고도 남을 여력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결코 가난할 이유가 없는 나라라는 소리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저들 자신만을 위해 나랏일을 한다면 기껏해야 자신들이 일하는 일터에 불이나 지르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목숨 걸고 투표에 임하고 실제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도 다반사로 생기는 것이다.
투표는 저개발 신생국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라면 어디서나 하는 것이기에 우리도 여지 없이 선거철만 되면 투표장에 가서 표를 던진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목적의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누가 일을 잘할 것이고, 누가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라는 것에 상관 없는 투표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자기 자신들로만 구성된 ‘우리’가 ‘남’이 아님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을 목격한다. 또, 일부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 하나 하나의 의지가 모여 세상일이 돌아간다는 것을 모른다는 듯이 주권 국민으로서 권리행사를 스스럼없이 포기하기도 한다. 현재 아프리카 신생독립국가도 아니면서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혼란은 바로 이와 같은 것에 원인이 있다.
부족주의-종족주의-혈연주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예전에 이곳 ‘명사 칼럼’에 실렸던 어느 한인회 원로 분의 글이 생각난다. 구부러지지 않는 뻗정팔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팔이 구부러지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을 수가 없으므로 서로 먹여 주면서 돕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 역시 그 뻗정팔을 가진 사람들이나 다를 것 하나 없는 부족한 사람들이므로 서로들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 칼럼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좀 고리타분하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어련히 늘 하는 이야기려니 하고 생각 없이 넘길 이야기만은 아닌 참으로 가슴에 새겨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