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 한국 제조업체의 생산기지로 떠오르면서 3위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올해 상반기 우리나라의 베트남 수출액은 151억7900만달러로 중국(583억7900만달러)과 미국(343억3100만달러) 다음이었다. 한국의 베트남 수출액 80%가 최종 생산을 앞둔 중간재다. 한국의 해외 생산 기지가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겨가면서 나타난 결과다. 한국과 베트남이 ‘윈윈'하는 현장을 가봤다.[편집자주]
8월 23일 오전 11시(현지시각)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에서 하노이까진 5시간이 걸렸다. 노이바이 공항 밖 하노이의 공기에선 비 냄새가 났다. 스마트폰에 뜬 하노이 기온은 33도. 한반도의 폭염이 연일 기승을 부렸던 탓인지 하노이 날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덥지 않았다. 공항에서 만난 대한상공회의소 베트남사무소 직원 추 반 뚜씨는 “어제 비가 많이 와서 오늘은 시원하다”고 말했다.
공항에서 하노이 시내까진 40여분이 걸렸다. 깨끗한 도로가 인상적이었다. 추 반 뚜씨는 “새 포장도로의 공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됐다”며 “요새는 도로 주변을 꾸미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 하노이 시내의 도로 상황. 버스 등 대중교통이 늘고 있지만 베트남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동수단은 오토바이다./윤희훈 기자
◆ 베트남 발전상이 투영된 하노이의 도로
하노이 시내에 들어서자 베트남의 명물인 오토바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도착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수많은 오토바이로 인한 심각한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대중교통 개발을 가속하고 있다. 버스 노선을 차츰 늘려가고 있으며 하노이와 호찌민에선 지하철 공사를 시작했다. 하노이 지하철 공사엔 포스코와 대림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공사 진척도는 더딘 상태다. 현지 한 기업인은 “새로운 공정이 들어갈 때마다 허가를 따로 받아야 한다”며 “심사를 까다롭게 하며 대놓고 뒷돈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반면 코트라 하노이사무소 직원은 “베트남 측의 잘못이라고만 몰아갈 수도 없다”면서 “문제가 생기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빠르게 해결하려고 드는 한국 기업의 태도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노이의 도로에는 베트남의 과거와 미래가 겹쳐있는 듯했다.
◆ 베트남으로 향하는 기업들…대기업에서 중소기업까지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 하노이의 산업단지 ‘꽝민 공단’을 찾았다. 꽝민공단까진 택시로 50분 가량이 걸렸다. 갑작스레 쏟아진 국지성 호우로 도로 사정이 악화됐다. 평소엔 30~40분이면 간다고 택시기사가 설명했다. 택시비는 30만동(vnd), 한국돈으로 1만5000원 가량이 나왔다.
꽝민공단엔 삼성전자의 1차협력사인 시노펙스를 비롯해 인켈, 해성 등이 진출해 있다. 꽝민공단의 최대 장점은 노이바이 공항으로부터 10분 거리에 있어 물류 관리에 유리하다는 점이다.
- ▲ 시노펙스 베트남법인 생산 현장에서 공장 근로자들이 전자회로기판을 조립하고 있다./윤희훈 기자
시노펙스는 이 곳에서 삼성전자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전자회로기판(PBA)를 생산한다. 직원은 1500여명, 이 중 한국인은 7명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현지화됐다. 김성권 시노펙스 베트남법인장은 베트남 진출의 최대 장점으로 ‘임금 대비 양질의 노동력’을 꼽았다. 그는 “9250만명 인구에 평균연령이 28.6세로 매우 젊다”며 “한 달 월급은 수당을 포함해 300달러 정도다. 중국에선 한 달에 700달러 이상을 지급해야 하는 것과 비교하면 절반이 채 안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국의 임금 수준은 가파르게 오르면서 한·중 간 임극 격차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무역협회 베이징지부 조사에 따르면 2010년 한국의 40% 수준이던 중국의 임금은 2015년 60% 수준까지 올라왔다.
김성권 법인장은 2009년 베트남에 처음 발을 디뎠다. 2013년 9개월 정도 한국에 들어가 있던 걸 빼면 베트남에서만 6년을 지냈다. 김 법인장은 “베트남이 6년 새 빠르게 발전했다”며 “처음 왔을 땐 ‘정말 변화가 없는 동네구나’ 했었는데 2012년부터 발전이 본격화됐다”고 회고했다.
가장 먼저 베트남 시장을 노크했던 건 섬유업체였다. 섬유가 노동집약 산업인 만큼 값싼 노동력을 찾아 베트남에 진출한 것이다. 그러더니 2010년부터 IT(정보통신) 기업들이 베트남으로 생산기지를 옮겼다.
수출입은행 해외투자통계(2016년 6월 말 기준)에 따르면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 기업은 4054개로 미국, 중국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역대 최대인 514개의 신규법인이 진출해 15억달러 가량을 투자했다.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생산라인을 옮겨왔다. 김 법인장은 “중국의 규제가 많아지고 임금 상승 등 노무 환경이 까다로워지면서 ‘엑소더스’ 현상이 짙어졌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2014년부터 2년에 걸쳐 중국, 태국 등에 있는 스마트폰, 가전 생산라인을 과감하게 베트남으로 옮겼다.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기, 삼성SDI 등 계열사도 이곳으로 생산 설비를 이전했다. 삼성의 대규모 이동에 맞춰 협력사들도 자연스럽게 베트남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시노펙스 역시 삼성전자의 베트남 이전에 맞춰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 ▲ 베트남 북부 지도. 검은점이 시노펙스 베트남공장, 빨간점이 삼성전자 1공장, 파란점이 삼성전자 2공장의 위치다. 시노펙스에서 두 공장까진 자동차로 40~50분 정도 소요된다./윤희훈 기자
삼성전자는 현재 하노이 동쪽 박닌성에 1공장과 북쪽 타이응웬성에 2공장을 갖고 있다. 이곳 베트남복합단지의 면적은 무려 300만㎡, 근무인력은 10만명이다.
LG도 베트남행의 속도를 올리고 있다. LG는 2013년부터 베트남 북부의 항구도시 하이퐁에 대형 생산단지를 조성했다. LG디스플레이는 베트남을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모듈 생산 기지로 삼을 계획이다. 지난 4월 건설에 들어간 LG디스플레이 1공장은 내년 하반기 1차 양산, 2018년 하반기 2차 양산에 들어간다. 조만간 2공장도 짓기 시작할 예정이다.
LS전선은 하이퐁에 위치한 LS-VINA 공장에서 전력케이블을 생산하고 있다. LS-VINA가 생산하는 전력케이블은 베트남을 넘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호주 등으로 수출된다. LS-VINA는 베트남의 주요 수출기업으로 자리매김했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베트남 정부로부터 수출유공자상과 노동훈장을 받기도 했다.
대기업들이 베트남에 연착륙하면서 중소기업들의 베트남행도 빨라지고 있다. 중소기업의 원활한 진출을 돕기 위해 중소기업중앙회는 올초 호찌민에 현지 사무소를 냈다. 조종용 중기중앙회 베트남사무소장은 “베트남 지역 공장 설립을 위한 산업단지 정보와 베트남의 경제 성장에 따른 소비재 수출 및 인증 관련한 문의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고 말했다. 중기중앙회는 9일 서울 여의도 중기중앙회관에서 베트남 중소기업 연합회와 공동으로 ‘베트남 투자환경 및 산업단지 설명회’를 개최한다.
◆ 한국 ’생산기지 확보’와 베트남 ‘산업 고도화’...양국 ‘윈-윈’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면서 교역량도 급증하고 있다. 한국의 베트남 수출 품목은 ‘무선통신기기’, ‘반도체’, ‘평판디스플레이 및 센서’ 등 중간재가 80%에 이른다. 한국에서 베트남 현지 공장에 중간재를 공급해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완제품을 만들어 제3국으로 수출하는 구조다.
지난해 한국의 베트남 수출 금액은 278억달러였던 반면 베트남으로부터의 수입 금액은 98억달러였다. 180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셈이다. 한국 입장에선 베트남은 대표적인 경상수지 흑자 국가다. 올 상반기에도 베트남 수출량은 전년 동기 대비 10.7% 늘어난 152억달러를 기록했다.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하면서 베트남 산업이 고도화되고 있다. 코트라 호찌민사무소 관계자는 “2013년 이후 베트남의 최대 수출 품목은 무선통신기기로 삼성 등 한국 기업의 진출이 베트남 수출산업 고도화, 하이테크 제품 수출비중 확대를 주도하고 있다”며 “베트남의 효자 수출 품목인 의류, 신발 역시 한국 기업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병국 코트라 하노이무역관 부관장은 “베트남 정부는 더 많은 생산 시설이 들어와 산업 기반이 확충되길 기대하고 있다”며 “최근 몇 년새 최저임금이 두자릿 수 이상으로 대폭 인상됐는데, 기업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올해는 6%대로 상승률을 대폭 조정했다”고 말했다.
- ▲ 한국의 對베트남 중간재 교역 규모 및 추이./코트라 제공
한국 기업의 진출은 베트남 국민의 소득 증대와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삼성전자 베트남법인의 한 임원은 “갤럭시S7이 출시된 날, 현지 직원 중 한 명이 갤럭시S7을 들고와 내게 자랑을 했다. ‘예약 신청을 해 출시하자마자 받았다’고 하더라”며 “‘비싼거 아니야?’라고 물으니 ‘갖고 싶던 걸 산 거’라며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비력이 상당히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득이 늘어나면서 베트남 직원들의 이직이 늘어나는 건 한국 기업 입장에선 골치거리다. 김 법인장은 “숙련도가 올라온 직원 중에서 임금을 더 주는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경우 늘고 있다"며 “이젠 기업 문화나 복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시노펙스 베트남 법인은 최근 설립 2주년을 맞아 직원들의 사연 등을 담은 잡지 형태의 사보를 냈다. 또 2016 리우올림픽에서 베트남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사격선수 호앙 쑤안 빈의 공식 스폰서도 했다.
김 법인장은 “금메달까진 예상 못했는데, 후원사로서 너무 기뻤다”며 “직원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사기가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어 “베트남에 진출하려는 기업들은 적은 비용으로 노동력을 마음껏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한다면 금물”이라며 “베트남과 윈윈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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