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로 해결하는 수출 클레임
(주)키카_강신영 고문
스포츠장갑
우리 회사는 스포츠 장갑, 즉 스키 장갑과 스노보드 장갑을 수출하고 있다. 겨울철에 끼는 장갑이므로 보온이 중요하고 눈속에서 이용하는데 눈이 녹으면 물이 되므로 방수 기능이 중요하다. 장갑을 끼고 얌전하게 스키나 스노보드를 탄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과격하게 스키나 스노보드를 즐긴다. 장갑은 원단 자체가 어느 정도 방수나 발수 기능이 있어 물이 안 들어오지만 봉제선과 바늘자국으로 물이 스며들어오기 쉽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장갑의 외피(겉감)와 내피(안감) 사이에 비닐 종류의 인서트를 하나 더 삽입하는 방식이다. 외피와 내피 사이에 접착제를 부분적으로 발라 이탈을 방지한다. 접착제는 마르면 딱딱해지는 것도 있어 클레임 사유가 되기도 한다.
클레임 잦은 스포츠장갑 인서트
비닐계의 인서트는 미끄럽기도 하고 안감은 스펀지나 솜을 사용하는데 특히 인조 솜은 보풀이 있어 접착제가 일정하게 도포되기 어렵다는 점은 스포츠장갑 생산에 있어 난점 중 하나이다. 생산에 앞서 샘플은 샘플개발실에서 최고의 기술자가 정성스럽게 만들지만 양산에 들어가면 품질이 일정하게 지켜지기 어렵다. 또 장갑을 끼고 사용하다 보면 손에 땀이 나서 손을 장갑에서 뺄 때 안감이 딸려 나가는 경우가 있고 이 경우 소비자가 다시 끼워 넣기는 어렵다. 다시 끼워 넣는다 해도 사용할 때마다 내피가 빠진다면 불편하고 사용하기 어려우므로 클레임을 걸어온다.
미국의 고디니(Gordini)에게 실어 보낸 장갑 한 컨테이너 물량이 몽땅 안감이 빠진다는 연락이 왔다. 그해 수주도 좋았고 생산도 깔끔하게 해내서 생산부 공신 7명이 동남아 포상 휴가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포상 휴가 대신 일단 클레임부터 처리하자며 미국 비자를 신청했으나 봉제반장 등 미혼의 여성들은 눌러앉을 가능성이 있다며 비자 발급이 거부되었다. 결국 공장장인 나와 생산부장 둘이 미국으로 날아갔다. 샘플 개발실에서 안감이 빠지는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로 실험해 보다가 주사기로 접착제를 장갑의 외피와 인서트 사이, 인서트와 내피 사이에 주사하면 되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지금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약간의 시너도 한 통 가져갔다. 접착제를 묽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수작업 포기하고 반송
우리가 찾아간 고디니(Gordini) 창고는 캐나다 접경지역의 한적한 동네였다. 그해 겨울은 하필 혹한이라 눈이 가슴팍까지 쌓여있었다. 식사 때 먹을 것이라고는 근처 주유소 매장에서 파는 딱딱한 샌드위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대로 먹었지만 밥 없으면 먹은 것 같지 않다는 부장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배를 곯아야 했다.
창고에 가보니 엄청나게 쌓인 우리 수출품이 안감이 빠지는 것을 시험해봤는지 엉망으로 놓여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선 동네에 나가 주사기를 구입해야 했다. 폭설로 멀리 나갈 수도 없었지만, 한적한 동네라서 주사기만 파는 곳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동물병원이었다. 사정사정해서 주사기를 비싼 값을 주고 사야 했다. 무슨 범죄에 사용하려는지 의심스런 눈길도 받아야했다. 다행히 주사기가 'Made in Korea'라서 반갑기도 하고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주사기를 여기저기에서 구입했다. 공장 한 구석에서 장갑을 하나씩 꺼내어 주사기로 내피, 외피 사이에 접착제를 흘려 넣는 작업을 했다.
그날 바로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더니 다음날부터는 작업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동네에서 한가한 인력을 찾아 아르바이트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워낙 시골이라 사람도 없었다. 70대 노부부가 찾아오기는 했는데 일손이 느려서 도무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주사기가 접착제를 버텨내지 못하고 녹아 내렸다. 결국 수선 작업을 포기했다. 제품은 다시 우리 공장으로 보내 전량 수선해서 보내는 것으로 처리했다.
클레임 해결이 대량 오더로 연결
인서트 문제는 우리뿐 아니라 고어텍스 등 유명 브랜드에서도 큰 고민거리였다. 의류에는 고어텍스를 접착하지만, 장갑은 접착하더라도 여전히 재봉 이음선과 바늘 자국으로 물이 들어가므로 결국 완전 방수는 인서트를 중간에 삽입하여 해결하는 방식밖에 없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인서트의 손가락 끝에 여분의 탭을 만들어 그 탭을 장갑의 외피와 내피에 같이 실로 박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인서트가 그런 방식으로 나온다.
인서트 이탈 문제로 바이어에게 신뢰는 잃었지만 포상휴가도 마다하고 즉각 날아가 최선의 노력을 보여준 것은 높은 점수를 딴 모양이다. 주사기 때문에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험난한 고역을 보여준 것도 도움이 된 것으로보인다. 몽땅 다시 싣고 와서 원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재선적한 것도 점수를 따게 해 그 바이어의 주문량은 더 늘어났다. 주문량을 소화시키기 위해 스리랑카에 공장을 세우고 가동에 들어갔을 때 첫 작업으로 이 바이어의 제품을 만들게 되었다. 간단한 디자인이라 값이 싸고 대량 주문이었으므로 대형 공장에서 작업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무려 10 컨테이너 분량을 실어냈다. 한 컨테이너에 약 1만켤레가 들어가니 10만 켤레 정도의 큰 주문이었다.
이번에는 봉제라인 불량
그런데 손가락이 다 돌아가서 팔 수 없다며 클레임이 왔다. 수량도 수량이지만 금액도 감당이 안될 정도의 큰 클레임이었다. 역시 공장장인 내가 혼자 미국으로 날아갔다. 어린이용 장갑이었는데 앞판과 등판은 검정색인데 손가락 가운데와 손 등 옆이 네온 옐로우 칼라라서 색대비가 뚜렷하니 손가락이 돌아간 것이 더 눈에 띄었다. 숙련된 기술자들은 재단물을 겹쳐 봉제할 때 당기는 힘을 일정하게 하지만, 비숙련자들은 당기는 힘이 일정하지 않아 손가락이 한쪽으로 당겨 돌아간 것이었다.
마침 바이어의 조카가 새로 들어와 일을 배우고 있었다. 내 또래인데다 중국 유학 경험도 있어 동양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며칠동안 같이 이 얘기 저 얘기하면서 친해졌다. 동네 일식집에 가서 식사겸 술도 마시고 스키도 타러 다니며 더 친해졌다.
어느 날 시내 스포츠 숍을 순방하면서 다른 회사 제품을 볼 기회가 있었다. 우리 제품은 손가락이 돌아간 정도가 심했지만, 다른 브랜드 회사의 제품들도 손가락이 안쪽으로 약간 돌아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갑은 직지(直指)라고 해서 책상에 놓았을 때 평평해 보여야했다. 그러다가 스노보드가 유행하면서 스노보드 장갑은 약간 안쪽으로 휘는 곡지(曲指)가 막 나올 때였다. 그 바이어는 스키장갑이 주 제품이었으므로 스노보드 장갑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나는 스노보드 장갑으로 재미를 볼 때였다. 스키장갑 외에 새로운 수요가 생겨난 것이다. 더구나 새로 일을 배우는 바이어의 조카는 내게 배운 것이 많았다
슬그머니 “팔아보자” 설득
그래서 곡지가 오히려 인체공학적으로 편하고 판매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설득했다. 사람의 손은 가만히 있을 때 약간 구부린 상태라는 것이 먹힌 것 같았다. 일단 그렇게 팔아보기로 하고 안 팔린 제품에 대해서는 클레임으로 처리해주겠다고 했다. 다시 만들어 주거나 주문 가격을 배상하기로 약속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장갑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클레임은 저절로 해결이 되었다. 클레임 대처방법은 우선 발뺌하려하지 말고 바이어의 입장에서 해결점을 찾는 것이다. 관계가 신뢰할 만해야 하고 단기보다는 장기적인 거래를 봐야 한다. 그러면 오히려 관계가 더 좋아져 주문 수량이 더 늘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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