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품평회 대상 휩쓴 ‘풍정사계’... “세계인을 취하게 할 것”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풍정1길에 있는 농업회사법인 유한회사 화양(和釀)은 ‘풍정사계(楓井四季)’라는 전통주를 빚는 업체다.
기자가 지난 7월 중순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에 금붕어가 사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옆에 막 피기 시작한 배롱나무꽃이 붉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작은 언덕 아래 기와집이 기품 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널찍한 마당엔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약 1000㎡의 뜨락에 자리 잡은 이곳은 전통가옥이자 화양의 본사다. 어디선가 술 익는 내음이 은은하게 퍼져 나온다. 뒤쪽 언덕 위엔 거대한 상수리나무와 느티나무가 울타리처럼 둘러 있고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 세 개가 집이자 본사를 호위하듯 중턱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춘하추동 계절마다 다른 맛과 향
남편 이한상 대표(65)를 도와 전통주를 담은 이혜영 씨(63)는 “이 집은 5대째 내려오는 한학자 집안이자 종갓집으로 지금도 일 년에 몇 차례 시댁의 가족과 친척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제사 때는 음식 장만 등으로 힘들만도 한데 그는 “형제들 간에 우애가 워낙 좋아 웃음꽃이 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때 술이 떨어지지 않는 건 물론이다. 마시건 안마시건 상관없이 술은 분위기를 살려주는 촉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풍정사계의 풍정은 예부터 물맛 좋기로 유명한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에 단풍나무 우물(싣우물)이란 뜻의 마을이름이다. 자연을 정성껏 술독에 담아 맛과 향이 다른 네 가지 술에 춘(약주), 하(과하주),추(탁주), 동(증류식소주)의 이름을 붙여 지은 것이다.
이 대표는 “봄은 감미로운 술, 약주”라며 “진달래가 활짝 폈을 때 할미꽃, 제비꽃 초대해서 같이 마시고 싶은 술”이라고 설명했다. 여름은 향기로운 술, 과하주(過夏酒)다. 상온에서 여름을 넘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조상의 지혜가 담긴 술인데 약주의 달콤함과 소주의 씁쓸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술이다. 그는 “찬 샘에 담가 놓은 맑은 술을 매미소리를 들으며 마시고 싶은 술”이라고 말했다.
가을은 맛있는 술, 탁주다. 목 넘김이 부드러워 완자전과 어울리는 이 술은, 이 대표에 따르면 “누렇게 익은 벼를 베다 논두렁에 앉아 추수의 기쁨을 함께하며 마시는 술”이다. 겨울은 귀한 술, 증류식 소주다. 도미찜, 고기요리, 진한 양념의 생선요리 등 맛이 진한 음식과 먹으면 한 번에 입안을 정리해 주는 술이다.
이 대표는 “눈발이 매섭게 파고드는 날 힘겨운 산행 후 산장 안에서 라면 끓여놓고 피어오르는 김을 안주삼아 마시고 싶은 술”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춘하추동은 국내산 쌀과 직접 디딘 전통 누룩(향온곡)으로 빚었다”며 “어떤 인공 첨가물도 가미되지 않았고 100일 이상 숙성됐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고 깔끔한 맛과 향을 지녔으며 숙취가 없고 뒤끝이 깨끗한 게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고향 풍정에 양조장… 전통누룩으로 빚어
이 대표는 원래 청주에서 사진관을 운영했었다. 그러던 중 아날로그 사진이 디지털로 바뀌자 전업을 생각하고 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고향 풍정에서 풍기던 전통주가 떠오른 것이다. ‘이왕이면 제대로 된 우리술을 연구해보자.’
그는 이런 생각에 서울, 경주 등 전국 곳곳을 다니면 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주의 은은한 향에 매료됐다. 10여 년 간 술 공부를 한 끝에 고향에 작은 양조장을 만들었다. 이 대표는 “어릴 적 할머니께서 직접 술을 빚으셨던 기억이 남아있는 풍정에 터를 잡게 됐다”고 말했다.
전통주 ‘풍정사계’를 만드는 화양의 본사이자 이한상 대표의 집. [사진=김영채 기자] |
처마에 매달려 익어가는 누룩. ‘향온곡’이라 불리는 녹두누룩으로 궁중에서 썼다는 전통누룩이다. [사진=김영채 기자] |
양조장은 대문 안 왼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 네댓 칸에 해당하는 크기였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처마 밑에 누룩이 매달려 있었다. 둥글넓적하게 녹두빈대떡처럼 빚어진 이 누룩은 술맛을 가름하는 핵심재료다.
이 대표는 “우리는 이 동네의 좋은 물과 쌀과 누룩만으로 술을 빚는데 바로 누룩이 맛을 내는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누룩은 처마 밑에 매달아놓고 자연 발효시킨다. 이 대표는 “비가 잦아서 날씨가 습한 일본에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전통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우리가 빚는 누룩은 ‘향온곡’이라 불리는 녹두누룩으로 궁중에서 썼다는 전통누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누룩으로 술을 빚는 것은 우리 전통 방법 중의 하나”라며 “관리하기 힘들고 자칫 잘못되면 술맛을 버릴 정도로 까다롭지만 우리는 좋은 녹두누룩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10년이 넘는 끈질긴 노력 끝에 2015년 풍정사계 ‘춘’이 탄생했다. 이 술은 양조장을 만든 지 1년 만에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최한 우리술품평회에서 최우수상(2등)을, 이듬해 우리술품평회에서는 대상(1등)을 차지했다. 놀라운 성적이다. 이 대표는 “품평회에는 보통 수백 종의 제품이 나오는데 거기서 1등을 한 것”이라고 자랑했다.
그 뒤 2017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국빈 만찬주로 선정됐다. 이 대표는 “전통 술 빚는 방법으로 직접 누룩을 디디고 100일간 옹기에 숙성시키는 등 최고의 맛을 내려고 노력한 결과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 2018년에는 평창동계올림픽 패럴림픽 때 만찬주, 2019년 벨기에 국왕 방한 시 만찬주로 각각 선정됐다.
무협 전문위원 도움으로 1300병 수출
수출은 뜻하지 않게 이뤄지게 됐다. 2019년 3월 국제소믈리에 자격증을 가진 재미동포 K씨가 풍정사계의 이름을 듣고 청주의 양조장까지 찾아온 것이다.
이 대표는 “아마도 술탐방을 하면서 국산주를 찾다가 풍정사계를 알게 된 듯하다”고 말했다. K씨는 맛을 음미한 뒤 이 정도면 얼마든지 미국시장에서 통할 것이라며 미국으로 수입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어떤 식으로 술을 수출할 수 있는지 절차 등에 대해 전혀 몰랐다. 이때 한국무역협회충북지부에 도움을 청했는데, 무역협회는 양성민 수출현장 MC(멘토링 컨설팅)전문위원을 소개해줬다.
수출현장 MC전문위원은 무역협회 지역본부별로 배치돼 해외시장 조사부터 마케팅, 바이어 발굴, 통관 및 물류, 계약·결제에 이르기까지 수출 전 과정에서 중소기업의 애로해결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대개 종합상사나 수출기업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무역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수출입은 물론 영어와 제2외국어까지 능통하게 하는 인재들이 많다.
양 위원의 서류작성 등 전폭적인 도움으로 1300병을 미국으로 수출할 수 있었다. 금액으로는 약 1만5000달러어치다. 이 대표는 “(이 술은) 뉴욕으로 나갔는데, 아마도 맨해튼 인근에 동포들이 많아 이들이 한국 전통주에 대한 향수가 있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이 수출 성공을 통해 더 큰 소득을 얻었다. 전통주를 수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는 2019년 충주무역상담회에도 참가했다.
이 대표는 “원래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조사를 비롯해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 나설 생각이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출장길이 막혀 바이어와 화상채팅 등을 통해 우리 술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도 우리 술에 대한 문의가 많다”며 앞으로 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외국인에게도 사랑받는 술 빚을 것
이 대표는 “우리 회사 사명인 화양은 1554년 어숙권이 만든 백과사전인 <고사촬요>의 ‘내국향온법’에 나오는 ‘조화양지(調和釀之)’의 줄임말”이라며 “화양은 찹쌀과 직접 디딘 누룩(향온곡)을 끓여 식힌 물에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조화롭게 섞어 빚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술은 그 맛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화로운 술이며 조화로운 술이 향기롭고 부드러운 술맛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결국 드시는 분들의 화합과 흥을 돋우는 술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이름”이라며 “화양이 만든 술이 해외동포는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