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의 신언서판(身言書判)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중국 당나라 시대 과거제도에서 인재 평가를 위해 활용했던 네 가지 기준이다. 외모, 언변, 글솜씨, 판단력이 뛰어나야 우수한 인재라는 말이다. 당시로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한 제도였을 것이다. 
 
지구촌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현대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신언서판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각 나라나 사회마다 문화 차이가 존재하므로 그만큼 다양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공통적이며 현대화된 신언서판이 작동하고 있다.
 
신=상대방 이해하고 글로벌 매너 갖춘
 
신언서판의 첫째인 ‘신’은 사람의 풍채와 용모를 뜻한다. 과거 인재의 판단 기준에서는 잘생기고 헌칠한 사람이 최고였겠으나, 현대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단순한 외모의 유불리는 그 차이가 크지 않다. 
 
필자의 경험상 현대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신이 뛰어난 사람은 상대방 문화를 이해하고 글로벌 매너(Manner)를 잘 갖춘 사람이다. 서양에서도 비즈니스 상대방의 첫인상을 매우 중요시하는데, 상대의 문화를 무시하고 국제매너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미 신뢰를 상실한 것이다. 
 
중남미나 아프리카에 가서 날씨가 무덥다고 반팔 셔츠를 입고 중요한 미팅에 참여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들이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미 속으로 낙제점을 주었을 것이다. 자신을 멋지게 보이려고 정장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예의를 갖춘 복장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국기업인들과 함께 출장을 갈 기회가 있어 동행하다 보면, 낮에 미팅을 할 때에는 양복을 잘 갖추어 입었다가 정작 더 중요한 저녁 만찬에는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필자가 부끄럽고 민망해진다. 당연히 비즈니스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더욱 눈살이 찌푸려진다. 모로코 카사블랑카 출장길에 있었던 일이다.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일행이었던 기업가 7명과 함께 현지 최고의 레스토랑엘 가게 되었다. 호텔 지배인이 알려준 ◯◯레스토랑에 택시를 타고 도착하니 레스토랑 입구 주차장에 세계적인 명차들이 가득했다. 택시를 타고 온 것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레스토랑에 입장하려고 하니 지배인이 놀란 얼굴로 앞을 가로막았다. 드레스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행 중 두 분이 잠자리에서나 입는 헐렁한 반바지 차림에 날씨가 덥다며 슬리퍼를 신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필자가 저녁식사 자리에 세미 정장을 부탁한다고 말을 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던 것이다. 
 
지배인에게 입장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해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두 분을 호텔로 복귀시켰다. 나머지 일행이 레스토랑에 입장해 보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중동, 유럽의 많은 부호들이 저녁식사와 음악을 즐기고 있었는데 모두 단정한 복장이었다. 매우 격조가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필자가 가본 아프리카 최고의 식당이었다. 그런 곳에 헐렁한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나타난 사람들을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언=가벼이 말하지 않고 약속 지키는
 
신언서판의 둘째인 ‘언’은 말을 잘하는 재주나 솜씨일 것이다. 이는 현대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신용이다. 가벼이 말하지 않고 한 번 약속을 하면 잘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인재인 것이다.
 
중남미에서는 공식 만찬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 덕담을 주고받고, 존칭을 사용하는 문화가 있다. 그런데 한국기업인들과 함께 현지에 나가 업무적인 일로 만찬을 하다 보면 때로 창피할 때가 있다. 복장도 문제지만 자리에 맞지 않게 저급한 말로 건배사를 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외국인들 관점에서 보면 성희롱으로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언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자각을 못한다는 점이다. 도리어 그런 언행이 자신을 타인에게 돋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수양이 덜 되었거나 국제문화에 둔감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수출하겠다고 지구촌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입장을 바꾸어 본인이 바이어라면 그런 사람들과 거래를 하고 싶을지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산동성 고당현(高塘縣)에 거주하는 친구들에게 받은 글이다. 글귀는 후덕재물, 즉 덕을 두텁게 하여 만물을 포용하라는 내용이다. [사진=필자 제공]
서=독서 많이 하고 지식·교양 쌓은
 
세 번째인 ‘서’는 글씨 자체 또는 글 솜씨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표현한다는 생각에서 인재의 기준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단순히 필적(筆跡)이 좋다거나 작문을 잘한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서를 갖춘 사람은 독서를 많이 하고 지식과 교양을 쌓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독서를 통해 쌓은 지식과 교양은 좋은 글과 품위 있는 대화의 밑거름이다. 바이어와 이메일 등을 통해 대화를 하다 보면 좋은 문장과 협상력이 경쟁력인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적은 글씨를 쓸 기회가 많지 않은 현대사회에서 의미를 많이 잃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동양에서는 어쩌다 소용이 닿을 때가 있다. 필자가 중국 산둥성에 원자재 구매를 위해 방문하면 오랜 친구들은 식당입구에 지필묵을 가져다 놓고 한 번 쓰고 들어가라고 한다. 
 
매번 갈 때마다 그런 요청을 받는데, 젊었을 때 서예를 익힌 적이 있어 졸필이나마 실력을 발휘한다. 문장을 하나 쓰면 이에 대한 대화로 식사 전 30여 분이 화기애애하고 친밀감이 배가 된다. 
 
판=신속하고 정확한 의사결정
 
네 번째인 ‘판’은 문리(文理)다. 즉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갖추는 것을 뜻한다. 뛰어난 판단이란 선입견이나 편견을 배제하고 사리사욕이 없으며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현대 글로벌 비즈니스에서는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결정 능력과 원칙을 잘 지키는 것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고 언변이 좋고, 글이 능해도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딘 판단능력을 가졌다면 그 사람을 훌륭한 인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필자에게 가장 어려웠던 결정은 중국 현지공장에서 생산하는 주요 생산품을 바꾸는 문제였다. 이윤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생산성이 없는 가방용 원단에서 폭발적으로 수요가 증가하고 이윤도 좋은 소파용 원단으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소파용 원단을 만들어 본 경험과 기술이 없는 회사에서 이를 실행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무모한 판단으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수도 있다. 그야말로 큰 위기였다. 
 
필자는 바꾸지 않아도 위험하고 바꾸어도 위험하다면 바꾸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결국 한 달 간 준비를 거쳐 과감하게 소파용 원단 생산 시작했지만 계속 나오는 불량과 품질저하 등으로 매출이 70%나 떨어졌다. 
 
하지만 다시 가방용 원단으로 바꾸지 않고 지속적으로 품질개선에 노력한 결과, 생산성과 품질 모두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 덕분에 매출도 증가했고 22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개발한 소파용 신제품으로 중남미 시장에 진출하는 데에도 성공했으니 그때 그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판단을 잘못 내렸다면 회사가 어려워져 중국에서 야반도주라도 해야 했을지 모른다.
 
신언서판보다 앞선 첫인상의 중요성
 
첫인상(First Impression)을 결정할 때 걸리는 시간을 국가별로 조사한 흥미로운 결과가 있다. 미국인이 15초, 일본인이 6초인데 한국인은 3초다. 상대방을 파악하는데 3초면 충분한 한국인들은 역시 눈치가 빠른 민족이다. 
 
어쩌면 비즈니스에서 첫인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신언서판의 범주보다 앞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인상이 결정되면 그 이후에는 여러 변수가 있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매우 신경을 써야 한다. 격식에 맞는 의복과 정제된 언어, 그리고 상황에 적절한 행동은 첫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해현갱장(解弦更張)’이라는 말이 있다. <한서(漢書)> 동중자전(董仲舒傳)에 나오는 말로 ‘거문고 줄을 풀어 팽팽하게 다시 맨다’는 뜻이다. 거문고 줄이 늘어져 있으면 음이 맞지 않고 훌륭한 연주를 할 수도 없다. 이럴 때에는 줄을 다시 풀어 팽팽하게 잡아매야 한다. 회사의 경영도 동일하다. 
 
제품이 변화된 시장에 맞지 않고 회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면 다시 세팅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튜닝’이라도 해야 한다.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싶다면 ‘조율’은 필수다. 글로벌 시대에 퇴보하지 않으려면 실시간으로 창조와 혁신을 쏟아내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논어> 안연(顔淵)편에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이라는 말이 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도 적용이 가능한 말이다. 지구촌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에티켓을 잘 지킨다면 인정받는 비즈니스맨이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정병도 사장은 1999년 4월 인조피혁제조 및 바닥재 수출회사인 웰마크㈜를 창업한 이후 경쟁기업들이 주목하지 않던 아프리카, 중남미 시장을 성공적으로 개척해 주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지구 60바퀴를 돌 만큼의 비행 마일리지를 쌓으며 ‘발로 뛰는’ 해외마케팅을 실천했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경기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공부했고 고려대학교에서 국제경영석사 과정을, 청주대학교 국제통상 박사과정에서 이문화 협상(CROSS CULTURE NEGOTIATION)을 공부했다. 저서로 ‘마지막 시장-아프리카&중남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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