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Distance)와 공간(Space)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Space or Distance)’는 지난 2년간 언론과 일반인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이 그의 저서 ‘숨겨진 차원(The Hidden Dimension)’에서 사람들이 영토권을 바탕으로 타인과의 상황에 따라 공간의 크기를 선택하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4가지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적당한 거리를 지켜야 편한 관계
그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공간을 ▷가족이나 연인 또는 가까운 친구에게만 허용하는 친밀한 공간(intimate space) ▷친구나 지인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개인적 공간(personal space) ▷회의나 사교모임에서 사용되는 사회적 공간(social space) ▷강연할 때 연사 주변에 형성되는 공적인 공간(public space)으로 분류했다.
친밀(밀접)한 공간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0.5m(46cm) 이내, 개인적 공간은 1.2m 이내, 사회적 공간은 1.2 ~3.6m 이내, 공적인 공간은 3.6m 이상의 거리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상대가 가족이나 친한 친구인지, 낯선 사람인지, 아군인지, 적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등에 따라 사회적 거리가 달라진다.
만약 상대가 너무 가까이 오면 불유쾌한 기분이나 공포감마저 생기고, 상대가 너무 멀면 거리감을 느껴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친밀한 공간을 침범할 수 있는 사람은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혹은 관심을 표하는 이성이다. 낯선 사람이 친밀한 거리를 침범하면 여러 가지 변화가 발생한다.
가령 당신이 처음 만난 사람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두른다면, 상대가 아무리 예의를 지키느라 기분 좋은 척 미소를 짓고 있어도 당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우리가 해외에서 바이어를 처음 만난다면 대개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을 때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그러다가 저녁식사라도 하고 나면 그 거리가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권 따라 사회적 거리도 달라져
홀은 이처럼 인간이 공간을 구조화하고 사용하는 방식이 대인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만 아니라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예들 들면,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문화권(영국, 미국, 독일 등)은 집단주의 문화권보다 더 많은 공간을 요구하며 공간을 침범당할 때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
북미권에 출장을 가서 상대 회사를 방문해 보면 우리나라처럼 탁 트인 사무실 공간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두 높은 칸막이나 장애물을 설치하고 독립된 공간을 만들어 업무를 한다.
집의 구조를 보면 아시아인들은 방을 2~3개 정도로 나누어서 생활을 하는 구조다. 특히 한국의 경우 예전에는 온돌 문화 영향으로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유아기부터 독립적인 공간(방)에서 생활을 하는 구조가 결국 사회생활에까지 연장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국을 포함해 많은 아시아 국가들도 이제는 독립적 생활공간이 일반적 추세인 것 같다.
서양화가 진행되면서 집단구조에서 개인의 생활공간을 중시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군대도 변했다. 과거 군대는 한 내무반에서 30여명까지 같이 어깨를 맞대고 생활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침대 사용으로 개인 공간이 확보된 생활을 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가 매우 짧은 중남미인들
중남미에 출장을 갔을 때 이 대인 거리 때문에 당황스럽고 놀랐던 적이 있다.
같이 서서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를 한 잔 할 때, 이들은 필자 바로 앞에 붙어서 대화를 한다. 50~70cm 정도 되는 거리인데, 아시아인들에게는 몹시 불편하고 당황스럽다.
처음에는 뒤로 약간씩 물러서며 대화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상대방이 점점 다가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들은 대부분 친숙한 관계라는 뜻에서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거리가 먼 것은 친숙하지 않다는 부정의 의미인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경우 아시아인들보다는 대인 거리가 짧지만 남미인들보다는 길다.
이렇게 문화권별로 사회적 거리가 다르니, 다소 불편하더라도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좋다.
회의나 모임 등에서 좌석배치 역시 문화적 권역별로 사회적 거리의 영향권 내에 있다.
서구인들은 집단을 이룰 때 서로 마주보면서 대화를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상대방과 얼굴을 맞대거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을 때 불편해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옆으로 앉아서 회의를 하거나 모임을 가진다. 중국에서 어떤 행사에 참여하거나 TV에서 회의 같은 장면을 시청하게 되면 거의 모두 그러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풍수 철학에서 비롯된 것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서로 마주 앉아서 직접 바라보는 시선을 싫어하는 문화 때문으로 풀이된다.
잘 모르면 상대회사에 방문을 할 때 상대방이 권하는 자리에 앉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하지만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권한다고 무조건 앉으면 곤란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아무리 거래관계라도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직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상석에 앉히는 것이 예의다.
또한 중국에서는 식사 자리에서 대개의 테이블에 상석 자리에는 표시를 해 두는데 식사비용을 지불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착석을 할 때 누가 지불할 것인가를 고려하여 앉아야 한다. 식사비는 식당 종업원들이 상석에 가서 청구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상황·국가에 따라 자리 배정 신경 써야
거리와 공간의 문제는 지배와 권력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포식자인 호랑이 같은 동물들이 열세종인 작은 동물에 비하여 큰 공간을 가지고 있듯이 인간도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보다 더 넓은 공간을 사용한다.
회사에서 대표와 직원 사이, 조직에서 간부와 조직원 사이에서도 책상과 의자의 크기가 다르고 사무실 규모도 차이가 있다.
미팅을 할 때 중요한 사람이 있다면 상석에 앉히는 것이 그러한 이유에서다.
일반적으로 중남미나 아프리카에서는 권하는 자리에 착석을 하면 문제가 없다.
단지 우리가 느끼는 정서와는 약간 다른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마주보며 앉아 미팅하는 경우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또 미팅의 경중에 따라 배석자의 직급이 변하고 좌석의 위치도 바뀐다는 것이다.
필자는 상황이나 국가별로 자리 배정을 생각하여 앉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가능한 정면을 응시하지 않는 자리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정면을 응시하여 앉으면 ‘경쟁(COMPETITION)’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유연하고 부드러운 자리 배치가 되도록 고려해야 한다.
‘협력(COOPERATION)’ 관계를 표현하도 싶다면 자리배치를 섞어서 앉도록 하면 된다. 상대도 매우 편안하다는 것을 느끼고, 여유 있는 대화를 가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구나 집기의 배치를 살펴보면, 미국에서 가구배치는 프라이버시를 위한 것이며 상호작용을 회피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프랑스는 중앙집중적으로 모든 것을 배치한다. 독일은 프라이버시가 중요하므로 사무실 가구는 사무실 전역에 흩어져 배치한다.
일본은 집단의 참여가 중요하므로, 책상들을 벽이나 분리대 없이 중앙에 지위에 맞추어 배열한다.
중남미에서는 소규모 회사에서도 비서를 룸을 두어 대표의 권위를 중시하는 경향이 많다.
아프리카 사무실에서도 칸막이로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개인주의가 증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비즈니스에서 거리와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지 않다. 상대와 불편하게 비즈니스를 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습성에 맞추어 적절한 거리와 공간 운영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