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약값이 싸기로 유명한 나라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싸게 유통되는 약가(藥價) 때문이다.
약가를 저렴하게 만드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경쟁이 심하다거나 생산 혹은 유통과정에 차이가 있다거나 약가를 일부러 낮추려는 정부의 통제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적용되는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도이머이(개혁)’ 정책의 영향으로 베트남에는 크고 작은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많이 진출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거대 자본의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커다란 힘을 행사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화이자, 사노피, 어벤티스 같은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신약 개발 능력과 높은 브랜드 인지도 때문이다. 이들은 막대한 시간과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신약 개발에 투자할 자본이 있다. 게다가 특정 약의 오리지널을 만들었다는 사실 덕분에 약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 있다. 특정 신약을 개발할 경우 그 약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특허기간이 주어지는데, 이들은 이 기간 동안 연구개발비를 뛰어넘는 수익을 벌어들인다.
하지만 그 기간이 만료되면 다른 제약회사들이 그 약에 대한 제네릭(generic), 즉 복제약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때부터 그 약을 개발한 오리지널 회사의 독점이 끝나는 동시에 복제약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베트남의 지리적 위치상 이 전쟁에 참여하는 나라가 상당히 많다. 거대 다국적 회사를 보유한 미국과 유럽,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을 포함해 세계에서 약값이 가장 저렴하다는 인도와 파키스탄, 중동 국가까지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조사업체인 BMI에 따르면 2014년 베트남 제약 시장의 총 매출은 38억 달러로 추정되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외국 제약품이었다.
배나 머리가 아플 때 우리가 흔히 먹는 진통제 하나만 보더라도 베트남에서는 저렴한 인도 제품부터 미국과 유럽의 값 비싼 오리지널 제품까지 구할 수 있다. 여러 국가의 베트남 진출에 따른 경쟁이 약가를 저렴하게 만드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 한 몫 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트남의 의약품 유통과정은 어떻게 저렴한 약가에 영향을 미칠까? 베트남의 의약품 소비는 약 절반 정도가 정부 운영 병원이 지배하는 병원 채널, 20%는 약국 채널, 15%는 도매상 채널을 통하고 나머지 15%는 의료기기를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을 통해 이뤄진다. 여기서 약가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채널은 병원이다.
정부 운영 병원은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에 걸쳐 의약품 입찰을 통해 자신이 필요한 품목을 선택한다. 여러 해에 걸쳐 소비된 의약품의 품목당 물량을 확인하고 병원에 할당된 보험카드의 숫자에 따라 입찰 계획을 세운다.
정부 건강사업부는 그런 병원들의 예상 소비물량을 차례대로 검토하고 통합하며 유통업자나 제약회사들이 제시한 제의를 인민위원회와 함께 협의한다. 동일 성분의 여러 제품가격 중 최저가가 낙찰되며 낙찰된 제품은 정부 운영 병원에 1년 동안 독점적으로 공급된다. 게다가 정부 병원의 낙찰 제품 가격 리스트가 여건상 입찰을 시행하기 어려운 타 지역 병원의 기준이 되는 바람에 중앙 병원의 입찰에서 승리하면 지역 병원까지 공급하기가 수월해진다. 입찰 결과를 기준으로 그 해의 의약품 가격은 물론 시장을 주도하는 제품이 결정되는 것이다.
문제는 다음 해의 입찰이다. 입찰에서 떨어진 나머지 제품들은 약국 채널 혹은 도매상 채널로 유통되는데, 수많은 약국과 도매상을 상대로 365일 경쟁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찰에서 떨어진 제품들은 낙찰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다음 해 입찰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전년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이 몇 년 되풀이 되다 보면 약가는 점점 저렴해져 터무니없는 가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입찰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유통업자들은 수출자나 생산자인 제약회사들에게 갈수록 더 낮은 매도가격을 요구하고 있다.
낮은 약가를 유도하는 베트남 정부의 의도는 무엇일까? 베트남에서는 의료 서비스를 받을 때 환자가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60~70%이고 의료보험이 나머지 25~35%를 충당한다. 2009년 10월 베트남 정부는 전 국민이 의료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지만 9000만 명에 대한 의료 서비스를 단기간에 보장하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료 서비스에 들어가는 비용 자체를 낮게 만들어야 하는데, 입찰을 통해 약가를 낮추는 것도 그 수단 중 하나다. 소수만 받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의료 시스템보다는 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전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정부가 그리는 그림에 가까울 것이다.
지난 2012년 보건부가 발표한 지침에서는 정부가 의료 서비스 분야를 어떻게 이끌고자 하는지 좀 더 확실해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의약품 관련 법이 수정됐다. 주요 사항은 베트남에서 생산된 복제약은 병원 입찰 시 우선 선택되고 베트남에 연구·개발(R&D)센터나 생산시설 투자를 장려하는 인센티브나 정책이 시행되며 정부 운영 병원의 입찰을 통한 가격 통제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이다.
둘째, ‘베트남 사람은 베트남 약을 우선적으로 써야 한다’는 신토불이 프로젝트다. 환자의 질병이 점점 전염성에서 비전염성으로 변함에 따라 의료 서비스 비용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이런 질병의 치료와 진단을 위한 인적자원, 장비, 기반시설에 대한 니즈 역시 높아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현지에서 생산된 약은 중앙 병원의 약 소비량의 11.9%을 차지했고 주 단위의 규모가 있는 지방 병원에서는 33.9%, 더 작은 지역의 병원에서는 61.5%를 차지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베트남 국내 약에 대한 태도와 인지도의 변화를 꾀하고 국내 제약산업의 생산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내에서 생산되는 약의 소비량을 50%에서 70%까지 전국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셋째, 입찰을 통해 조달되는 의약품의 종류를 복제약, 전통약, 브랜드약(오리지널)으로 나누겠다는 안내문을 발행했다. 브랜드약의 경우 엄격한 서류심사를 거쳐야 할 뿐만 아니라 병원에서 필요할 때만 입찰을 하고 필요 제품 리스트에도 거의 올라 있지 않아 입찰에서의 입지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이 모든 지침은 베트남 정부가 거대 다국적 회사들에 맞서 자국의 제약 산업을 성장시키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저렴하게 형성된 약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베트남 제약산업은 정부의 의도대로 되어가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많은 제약 공장이 다국적 제약회사의 현지법인 형태를 띠고 있고 자국 의약품에 대한 신뢰는 낮다. 입찰과 같은 제도를 통해 정부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얼마간은 좋을 수 있겠지만 도를 넘으면 관련 산업을 성장이 아닌 정체로 이끌 수도 있다. 다국적 회사들이 베트남에 투자해 제조기술을 전수할 뿐만 아니라 공동 브랜드를 만들어 인지도를 높이는 식으로 베트남 정부의 의도에 부응한다면 윈-윈의 길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현영
베트남 호치민
한국유나이티드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