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으로 돌아가 엄마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기쁘다. 빨리 엄마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한국으로 시집온 지 한달도 안 돼 돌아가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난 상관없다. 그러나 엄마가 슬퍼하고 더 아플까봐 두렵고 걱정된다.'
올해 초 한국에 시집온 베트남 출신 신부 쩐 타이 란씨(22)가 죽기 전 남긴 일기의 한 부분이다. 그는 한국에 온 지 일주일만에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결정한 후 이 글을 썼다. 그는 4일 후 남편의 폭력으로 허무하게 세상을 떴다.
지난해 6월에는 역시 베트남 출신 신부인 후안마이씨(19)가 남편의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두 사건은 최근 10년 사이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고 있는 다문화가정 속에 내재된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혼과 함께 시작된 폭력
그동안 한국을 찾은 외국인 처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통과의례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다문화가정의 수가 100만으로 추산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국 여성들이 감내해야할 어려움과 고통은 이미 한계를 초과한 상태이다.
"결혼한지 한달만에 남편이 알콜 중독자인 걸 알았어요. 처음에는 말이 안통한다고 답답하다며 큰소리를 질렀어요. 나중에 한국말을 익혀보니 그게 다 욕이었어요. 조금 더 지나니까 술만 마시면 주먹을 휘두르더군요. 이게 아니다 싶어도 막상 하소연할 데도 없었어요. 말도 안 통하고, 당장 중국으로 돌아갈 돈도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어요. 먼저 결혼해 그래도 별 탈 없이 사는 동포언니들한테 새벽에 울면서 전화로 하소연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에요. 남편과 헤어진 지금,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해서…."
지난달 29일 용인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한족 여성 리우첸씨(25.가명)는 서툰 한국어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그는 2004년 5월 한국 국제결혼업체의 소개로 한국인 유모씨(41)와 중국 현지서 결혼식을 올리고 석달 뒤 한국을 찾았다. 수원의 한 철공소에 다니는 남편 유씨는 자신보다 나이는 훨씬 많았지만 웃음이 많고 여자를 배려할 줄 아는 매너를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한국드라마를 보며 성장한 그는 매운 김치도 즐길 줄 아는 전형적인 신세대 여성이었다. 드라마 속에서의 단란한 결혼생활을 꿈꾸던 리우첸씨는 그러나 거듭된 남편의 음주와 폭력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지난해 겨우 남편과 이혼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성구호단체의 도움으로 직장을 새로 잡고 독립생활은 해온 리우첸씨는 "그나마 둘 사이에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년께 중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가정폭력, 다문화가정 해체의 주요 원인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07년 전국 이혼통계'에 따르면 한국인과 외국인 이혼건수는 전체 7.1%에 달한다.
한국인 남편과 외국인 신부 사이의 이혼은 5794건으로 전년보다 무려 44.5%나 증가했다. 이혼 사유로는 가족 갈등이 20.2%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고 가정폭력은 7.35%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가족갈등과 가정폭력이 동시에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문화, 언어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외국인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유무형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외부에 알릴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7.35%란 수치는 현실성이 없다고 본다.
남편과의 이혼을 우려해 폭력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못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의 동포 모임에서 하소연하는 것 이외에는 마땅한 해결책을 못찾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최근 지난해 다문화 가정의 부부 폭력 발생률이 일반 가정에 비해 7.4% P 높은 47.7%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주 여성 긴급 전화 1577-1366'가 밝힌 지난해 외국인 이주 여성 상담 건수는 1만3277건에 이른다. 상담을 통해 도움을 요청한 여성들의 대부분은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이혼을 심각히 고려중이었다. 베트남(42.94%)과 중국 (25.55%) 출신 이주 여성들의 상담이 70%에 달한다.
4살 연상의 한국 남성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둔 10년차 주부 땅띠자우씨는(38.베트남) 자신의 주변에 "10명 중 7~8명은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각종 통계치와 외국인 여성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다문화가정의 절반 정도는 크고작은 육체적, 정신적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부부간 의사소통 부재 심각
안산이주민센터 박천응 목사는 4월 3일 캄보디아 정부가 자국여성의 국제결혼 서류 발급을 잠정 중단키로 결정한 것을 거론하며 "캄보디아 여성 7명이 한국에서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귀국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캄보디아 여성들은 남편의 거듭된 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귀국행을 결심해야 했다. 이 여성들은 "남편은 물론 가족들과 변변한 대화를 나눌 수조차 없을 만큼 고립된 생활을 했다"고 현지 언론에 털어놓았다.
소통부재는 가정폭력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소통부재는 다문화가정의 출발점부터 떠안아야할 숙명적인 짐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문화가 서로 접목되면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언어문제부터 출발해 주거, 음식, 여가활동 등에서 다양하게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한국남성들은 외국 배우자에게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한국남성들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즉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결혼을 위해 국제결혼중개업체 등에 상당한 대가를 지불한 남성들은 부부생활 속에서 심리적 보상을 받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
반면 외국여성들의 상당수는 한국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학력인데다가 국제결혼을 감행할만큼 독립성이 강해 가부장적인 행태에 적지 않은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현재 이주여성이 국적을 취득하거나 체류연장을 하려면, 그 과정에 한국인 배우자의 조력이 필수적이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여성들은 결혼 후 2년을 살고 필요한 경제적 서류를 한국 남편의 동의하에 1년 반의 심사를 거쳐야만 한국 시민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국적체계는 한국남성에게 당연히 이주여성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이는 결국 이주여성을 가정폭력 등 인권침해적인 상황 속에 취약한 구조로 내몰게 되는 부분이 있다는 지적이다.
결혼이주자 일방에게만 부가된 한국 사회로의 정착과 통합의 짐을 어떻게 한국인 가족과 한국사회가 함께 분담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사회 제도적 정비가 시급한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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