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 8명으로 구성된 포스코 CEO 후보추천위원회(위원장 서윤석 이화여대 교수)는 정 사장과 윤석만 포스코 사장(61)을 면접한 뒤 이같이 최종 결정했다. 포스코 측은 “엔지니어 출신인 정 사장이 비상경영 체제를 이끌 적임자라는 데 공감대가 모아졌다”고 밝혔다. 정 사장은 2월 27일 주주총회에서 회장으로 공식 선출된다.
정준양 회장 내정자는 이구택 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일찌감치 유력한 회장 후보로 손꼽혔던 인물. 서울대 공업교육과를 졸업하고 75년(공채 8기) 포스코에 입사했다. 이후 생산기술부장, 유럽연합(EU) 사무소장, 광양제철소장, 생산기술부문장 등 생산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2002년 27년 만에 뒤늦게 임원으로 승진했지만, 이후 2004년 전무, 2006년 부사장, 2007년 사장에 취임하면서 고속 승진했다.
특히 포스코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던 고수익 제품 생산이나 신공법 개발 등에 정 차기 회장은 역량을 발휘해왔다. 고급 자동차 강판 국산화를 주도, 생산 설비 증설과 조업 기술 개발을 이끌면서 자동차 강판 연간 650만톤 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자동차용 고급 선재, 고기능 냉연제품 등 전략 제품 개발에도 일조했다. 친환경 신기술인 파이넥스 공법의 상용화도 주도, 2007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파이넥스 공법은 이구택 회장 재임기간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구택 회장이 CEO 후보추천위원회에 정준양 사장을 단독으로 추천한 점도 그가 현장과 경영흐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때문이다. 지난해 포스코 사장이 된 데에도 철강뿐 아니라 포스코 핵심 계열사에 대한 경영 상황을 파악하라는 이구택 회장의 배려가 있었다.
포스코 내부에선 내부 승진이란 점에서 환영하는 분위기다.
포스코 관계자는 “엔지니어 출신으로 업무에 정통해 비상 상황인 현재 상황에 적절한 선택이 이뤄진 것 같다”고 환영했다. 정 사장이 몸담고 있는 포스코건설 직원도 “짧게 건설 사장을 했지만 모기업 회장으로 영전한 만큼 직원들이 반기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 반응도 나쁘지 않다. 김경중 삼성증권 파트장은 “포스코는 철저하게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회사인데 갑자기 외부인사가 CEO로 올 경우 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다”면서 “일단 내부 승진은 환영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내부 승진을 통해 일단 조직 동요는 막았지만 정준양 차기 회장에게 주어진 과제가 만만치 않다. 당장 대내외 여건이 최악이다.
포스코는 수요 감소에 따라 경영환경이 악화돼 1분기 실적이 최악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양기인 대우증권 연구위원은 “수요 감소와 가동률 하락 등으로 상반기 실적이 저조할 게 분명하다”면서 “경기 회복이 지지부진하면 포스코 실적 또한 1년 이상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엔지니어 출신 생산전문가
이미 포스코는 임원 연봉 10% 반납과 원가 절감에 나선 상황. 정준양 차기 회장은 시황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생산체제를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조업 방식도 새로 구성해야 한다. 문제는 뾰족한 카드가 없다는 것. 양기인 연구위원은 “시황 자체가 나쁜 데다, 포스코가 집중적으로 키워왔던 고수익 제품에서 실적이 나빠질 수 있지만, 모두 외부 환경에 좌지우지되는 측면이 강해 정 차기 회장이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경쟁이 격화하고 있는 국외 철광석 자원 확보와 지지부진한 인도와 베트남 일관제철소 건설 프로젝트도 재정비해야 한다. 김경중 파트장은 “철광석 광산 지분이 시장에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정 차기 회장이 이에 적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민영화 이후에도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만큼, 정 차기 회장이 이를 극복하는 게 가장 큰 숙제로 남게 됐다.
포스코는 지난해 매출 30조6420억원, 영업이익 6조5400억원의 거대 기업이다. 재계순위(공기업 제외)로도 6위에 올라 있다. 하지만 민영화 과정에서 지분이 분산돼 말 그대로 ‘주인 없는 기업’으로 남았다. 공기업과 독점으로 성장한 까닭에 ‘국민기업’이라는 인식도 강하다.
이구택 회장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과거 김만제 전 회장부터, 유상부 전 회장, 이번 이구택 회장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번번이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포스코 위상이 흔들린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망은
A애널리스트는 “회장은 청와대에서 내정하고 포스코는 이에 적당히 맞춰지는 관행이 계속돼왔다”면서 “글로벌 기업을 표방하는 회사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포스코의 한 부장은 “정치적 외압이 있었겠지만, 본인이 아니면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다”면서 “사외이사들이 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하지만 이들까지 정권에서 영향력을 미쳐온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외압 논란이 일자 이구택 회장 스스로 나서 “자진 사퇴에 외풍이나 외압은 없었다”며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포스코 회장 교체와 관련해 업계에선 A의원과 청와대 실세, 박태준 명예회장 등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된 이구택 회장을 여권에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여기에 현 정권의 정치적 기반인 포항 지역은 포스코와 관련이 깊다. 정권 실세들과 포스코가 어떻게든 엮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셈.
CEO 교체가 사실상 정해지자 이구택 회장이 이들에게 ‘내부 승진’을 확약받았다는 풍문도 들린다. 이구택 회장이 물러나는 대신 정준양 사장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외부인사가 회장으로 오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한 노력이었다. 여기에 후보추천위원회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허성관 씨,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등이 포함돼 있어 무리한 외부 인사 영입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준양 차기 회장은 이런 역학 구도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박태준 명예회장이 다른 사람을 지지했다는 소문이 있는 만큼 정준양 차기 회장의 입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불분명하다”면서 “이구택 회장의 지지와 더불어 조직을 추스르는 차원의 인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정 차기 회장은 내년 2월경 다시 연임 여부를 결정받아야 한다. 1년 동안의 경영성과와 함께 내부 혁신 여부에 따라 연임 여부가 판가름 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또 다시 외풍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포스코 안팎에선 내년 2월 연임 여부 과정에서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나 사공일 전 국가경쟁력위원장이 올 것이란 소문도 들린다.
실패로 돌아간 대우조선해양 재매각이 화두로 떠오를 가능성도 점쳐진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매각 당사자인 은행은 물론이고 여권에서 대우조선해양 매입의 적임자로 포스코를 지목해왔는데, 이구택 회장의 판단 실수로 무산됐다는 인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매각 과정이 재개되면 정부와 정치권 실세들의 판단 여부에 따라 정준양 차기 회장이 움직여야 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전했다.
실제 박태준 명예회장의 경우, 대우조선해양의 포스코 인수에 강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외부와의 관계 설정도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주로 생산현장을 지켜왔지만 앞으로는 기업 전략을 짜고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만큼 정계, 관계, 재계 등에 본인을 내보일 필요도 있다. 철강업계에선 정 차기 회장을 엔지니어 출신 생산 전문가 등으로만 알려져 있다.
이 부문을 보완해 나가는 것도 정치적 외풍만큼 CEO 연임 과정에서 중요한 과제다. 1년짜리 CEO로 남을지 포스코의 새로운 수장으로 입지를 다질지는 정 차기 회장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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