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한영민4

kimswed 2010.02.14 14:42 조회 수 : 1377 추천:418



베트남에서 지내면 도무지 시간가는 것을 모릅니다. 항상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생활에서 시간의 변화를 느끼려면 뭔가 주변에 바뀌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 늘 비슷한 날씨에 변치 않는 푸른 나무, 유사한 복장에 무관심한 듯 보이는 지리한 얼굴들로 채워진 베트남에서는 정말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날씨라도 추워지거나 나뭇잎이라도 새로운 색으로 치장을 한다면 그나마 뭔가 조용히 기척도 없이 달리는 것이 있다고 느낄 텐데, 항상 무더운 상하의 도시에서 그런 낭만적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허연 벽에 덩그러니 걸린 달력의 마지막 장이 맥없이 너풀대는 모습에 문득 그 동안 밀린 숙제를 내밀 듯 한아름 상념의 보따리를 풀어놓고 가는 시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렇구나 또 한 해가 넘어가는 구나. 매번 그랬듯이 올해도 별달리 채운 것도, 남긴 것도 없이 또 한 해가 넘어갑니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을 이곳 베트남에서 제대로 손 꼽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보낸나 봅니다.
시간과 자신을 분리한 채, 항상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있는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철없이 뒹굴어 왔지만 어느 날 마주한 시간의 거울 속에는 뜨거운 태양에 찌든 깊은 주름이 마치 불청객의 어색한 미소처럼 세월의 흐름을 일깨워줍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가고 다시 새로운 해가 다가오는 것은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 같이 명확하게 정해진 일이건만 중년의 나이에도 매번 새삼스런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요?  

연말과 중년은 같은 모양입니다.
도시 저편에 걸린 붉은 해가 아쉬운 듯 만들어내는 긴 그림자, 축 늘어진 어깨, 공연히 허전해서 자꾸 주머니를 찾아 드는 외로운 손, 별로 관심 있게 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돌아온 길에 누군가 서있을 것 같아 자꾸 뒤 돌아 봅니다. 어느새 지나버린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자 지나간 세월의 아쉬움입니다.

하지만 중년이 된다는 것은 그리 서글프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젊은 날의 치열했던 삶도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별로 흥미 없는 공부를 핑계로 소설책 한 권 제대로 못 읽고 넘어간 학창시절은 반복하기에는 너무 고달픈 느낌이고, 암흑같이 무겁게만 느껴지던 군생활도 돌아보기 싫고, 점심 시간도 없이 좇아 다니던 오파상 생활은 넌더리가 납니다. 마지막 남은 돈을 다 털어 아틀란다 행 비행기를 타고 최후의 단판을 지으러 떠나던 비장한 심정은 결코 두 번 다시 겪을 일이 아닙니다. 아들 아이 태어날 때 혹시 육 손가락이 아닐까 하는 심려는 가벼웠나요? 흔들리는 회사를 두고 밀고 당기는 동업자와의 신경전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악몽일 뿐입니다.

과거는 모두 미화됩니다.
아무리 힘들었던 과거도 일단 지나고 나면 흐뭇한 추억으로 남습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추억으로 남고 미소로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나간 과거를 다시 반복해야 한다면 그 과거가 그렇게 미소로만 남을 수 있을까요?
숨이 찰 정도로 긴박하고 치열했던 과거의 역사를 이미 다 거치고 나온 중년의 시간이 너무 좋습니다.

비록 노후 생활을 위해 남겨둔 재산은 없어도 그렁저렁 살만하고, 회사는 말아먹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믿을 만한 직원들이 있고, 언제나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고, 전화도 끊어놓고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친구들과 골프장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는 여유도 좋고, 골프 스코어가 원하는 것만큼 안 나와도 별로 개의치 않는 평화가 있어 좋습니다.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편안합니다. 불편한 사람은 안 만나도 되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남의 눈이 그리 버겁지 않습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 노력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중년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것일 수 있습니다, 인정을 구하지 않는 것.
人情이 아니라 認定입니다. 남에게 “그렇다고 여김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 젊은 날의 역사는 헤겔의 말처럼 “인정을 구하기 위한 투쟁”으로 채워집니다.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과 선생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고, 친구를 사귀면 의리 있는 친구로 인정받기 위해 두려움도 삼켜야 하고, 애인을 만나면 장래의 남편감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상한 면모를 만들어내고, 직장에 들어가면 능력 있고 성실한 사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면 살아오지 않았던가요? 사업을 하면 거래처 인정을 받아야 하고, 신용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은행의 지점장을 찾아 다니지는 않았던가요?

삶의 흔적은 이렇게 타인의 시각을 통해 드러납니다.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잘 관리한 사람은 괜찮은 사람, 같이 지낼 만한 사람 혹은 성공할 사람으로 기억에 남게 됩니다.
그렇게 인정받기 위한 각고의 노력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자산으로 쌓여 갑니다.
젊은 날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훈련시키는 아주 유용한 동기가 됩니다. 자신을 차버린 애인을 후회하게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라는 인정을 구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타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대로 인정받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치열한 경쟁과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런 순수한 노력을 통한 인정대신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는 쉬운 길을 택합니다. 골프는 대충치고 스코어는 지우개를 이용해 맘에 들게 만들어 내는 격입니다.
가진 게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모르는 걸 아는 척하며 나서고, 경력도 가공하고, 집안의 내력도 포장하고, 심하면 학력도 속이고, 나이까지 부풀립니다. 사상 누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떨치기 쉽지 않은 유혹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십 년을 그렇게 거짓말하다 보면 나중에는 자신이 거짓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거짓으로 꾸민 가공의 자신을 진짜 자신으로 믿는 겁니다. 거짓과 참이 뒤집어 집니다. 인정 중독현상입니다.

중년이 된다는 것, 이제 그런 인정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정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굳어진 인식이 있으니 새삼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중년이 되어 더욱 좋은 점은 젊은 날에 느끼지 못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한여름 밤의 꿈같이 짧은 인생입니다. 아등바등 안달을 하며 살아도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부질없는 애착으로 삶을 소진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조금은 달관한 마음이 생기니 조급함이 줄어들고 주변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는 여유가 생겨납니다. 새로 생길 것도 없으니 현재 가진 것이 더욱 소중해집니다. 가족이, 친구가 그리고 미소를 보내는 주변 사람들이 새삼스레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지난해 그렇게 소중한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줬는지 돌아볼 시간입니다. 새해는 맘대로 행하여도 어긋남이 없더라는 종심(從心)의 단계는 도달하지 않더라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남을 인정하는 중년의 모습은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편집장_한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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