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회장 선거에 즈음하여
경인년의 새해가 시작되면서 벽두부터 교민사회는 제 10대 한인회장 선거로 가볍게 술렁거리고 있다. 지난 해 제 9대 회장의 중도사퇴로 교민사회에 명예스럽지 못한 흔적을 남기고 해를 넘긴 후 다시 새롭게 제 10대 한인회장 선거가 시작됐다.
다행하게도 독소 조항처럼 남아있던 정관 개정 조항이 총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다시 재 개정되고 후보자의 기탁금 역시 3만 불에서 1만 불로 줄여 합리성을 어느 정도 되찾은 덕분인지 예년과는 달리 남의 손에 마지 못해 떠밀려 나오는 듯한 모양새가 아닌 스스로 자청하여 출마한 두 명의 회장 후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호 1번을 차지한 후보는 여성으로 지난 수 년 동안 한국부인회의 회장으로 봉사하여왔고 또, 한인회를 바로 잡자는 비상대책위원회를 맡아 일하던 민복희씨고, 기호 2번은 교민사회에서 수많은 봉사활동의 흔적을 보인 황의훈씨다. 두 분다 지난해 총영사관에 의해 평화통일 자문회의 위원으로 추천, 임명된 일단의 검증을 거친 인사들이다.
이번 선거 판이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후보자 두 명이 한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여자라는, 성별 대결구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한 명은 기존의 한인회의 활동에 유화적 행보를 보이던 인사와 다른 한 명은 그들의 활동에 날카로운 비판적 행보를 보이던 인사와의 대결 구도라는 데 있다.
인터뷰를 통해 본 그들의 성향은 마치 손 바닥과 손등처럼 봉사라는 뿌리는 같지만 드러나는 모양새는 서로 다른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지난해 비대위원장을 거치면서 뜨거운 논란의 한 가운데 서서 한인회의 행보에 서슴없는 비판을 날리며 한인사회 바로 세우기를 부르짖던 민 복희 후보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는 개혁적인 구호로 교민사회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자신을 회장으로 내세우고 있고, 교회와 NGO를 통해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오던 황의훈 후보는 역시 지금까지 보여왔던 그의 성향대로 화합의 기치를 내세우며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여 <화합과 통합으로 하나가 되자> 라는 평화적 구호로 자신을 회장의 적임자로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싫으나 좋으나 교민사회의 밝고 어두운 모든 실상을 낱낱이 보고 들을 수 밖에 없는 교민 잡지 발행인에게는 이번 선거는 교민사회의 길었던 어둠의 터널을 빠져 나오는 출구전략의 시작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 동안 한인회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은 무가치의 조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몇 특정 인사들의 입김에 의해 모자라는 이력이나 부적합한 직업 등을 다 접어둔 채 회장이 선출되어 교민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고, 그렇게 선출된 회장 역시 수만의 교민을 대표하는 한인회장이라는 허울좋은 감투에만 안주하며 조직의 활동보다는 개인적 명예를 즐기는 정도의 지각수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회장이 영입한 임원진 역시 교민사회에서 공적으로 검증된 인사들보다는 개인적인 친목관계를 우선으로 무작위로 지정되기 일수고 또 지목된 인사들은 그저 이름만 걸어두고 임기 내내 회의 석상에 얼굴 한번 드러내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니 한인회가 생긴지 15년이 가깝게 되지만 아직도 단체 라이센스 조차 받지 못한 채 공식적인 활동이 불가한 기형적인 조직으로 남아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번에 출마한 회장 후보자를 교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두 분을 직접 인터뷰하며 느낀 것은 이제는 좀 앞이 보이겠구나 하는 희망의 감정이다. 두 분 다 회장으로서 충분한 의욕을 지니고 있고 지역 지도자의 가장 기본적 요건이라 할 수 있는 봉사의 자세가 이미 각자의 삶에 녹아있는 분들이었다. 누가 되더라도 일부 사욕을 버리지 못하는 노쇠한 기존 인사들의 입김만 배제한다면 훌륭하게 회장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분이라고 보았다.
두 분의 성향을 굳이 구분한다면 진보와 보수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여성으로서 민복희 후보는 지난 날의 상처를 다 말끔히 도려내고 치료한 후 건강하고 새로운 몸으로 새 출발하자는 ‘진보적 개혁논자’라고 본다면, 황의훈 후보는 나눔과 봉사정신으로 그간의 상처를 덮고 다 같이 이해하여 함께 가자는 ‘보수적 실용논자’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인물들이 등장한 선거 판이 여전히 시끄러운 것은 유감스럽게도 신선한 후보자들의 면면과는 달리 아직도 구태를 벗지 못한 한인회의 공정 선거관리위원회에 그 원인이 있는 듯 보인다.
결국 후보자 등록부터 삐걱 소리가 크게 새어 나왔다.
민복희 후보에게는 엄격한 잣대로 꼼꼼하게 후보자 등록 구비 서류를 챙긴 선관위가 황의훈 후보의 서류는 무슨 이유인지 미비한 서류를 대충 넘기다가 그만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선관위는 요구한 서류가 정관에 나온 의무 서류가 아니라 관례적으로 시행된 것이라 법적인 문제가 될 것이 없고, 또한 서류가 완전치는 않지만 사후 보완이 되었으니 후보등록이 유효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당연히 민 후보 측에서 반발을 하자 선관위는 화합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민 후보에게 수락할 것을 요구하고, 또 한편 선관위의 결정사항에 따르지 않는 것은 후보자의 결격사유가 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결국 민 후보 측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여부에 선거 판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물론 민 후보가 선거판을 깨버리는 선거 보이콧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여지는 희박해 보이지만 이 일이 공정하게 처리되지 않을 경우 그런 선택을 할 여지가 전혀 배제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심상찮은 문제를 만들었다.
또한 한인회의 누적 회원이 전체 8-9만 교민의 1%에 불과한 고작 천 명 정도의 정회원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지는 기형적인 선거 판에서 그나마 개인정보의 보호차원에서 회원의 정보가 공개되지 않자 도대체 누구에게 어떻게 선거운동을 하라는 말인가 하며 양 후보 모두 기본적인 회원정보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제서야 투표를 고작 2주일 남기고 선관위는 경찰영사의 자문을 받아 이름과 나이는 공개하고 연락처는 본인이 허락하는 경우에 한하여 공개를 검토하겠다고 한다. 물론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개인정보가 임의로 공개되는 것은 범법사항이 되니 공개할 수도 없지만 투표를 2주일 남겨놓은 시점에서 공개 방법을 찾겠다면 언제 회원들에게 허락을 받고, 언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정도는 미리미리 준비가 있어야 할일 아닌가?
물론 선관위라는 자리는 무보수 봉사 직으로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되면 온통 욕 바가지를 뒤집어 쓰는 위험 천만한 자리다. 그러나 무보수 봉사 직이라고 해서 맡은 일을 대충해도 된다는 면책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날 선 공방을 할 수밖에 없는 선거 판을 평화롭게 잘 치를 수 있는 절대 요소는 공정하고 주도 면밀한 선관위의 활동이다. 적어도 선관위원을 맡아 한인 사회의 가장 큰 조직인 한인회장 선거를 관할하는 일을 한다면 일정부분 책임을 느껴야 한다. 책임이란 자신의 일에 대한 언행에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저 기분대로 말하고, 나이가 많다고 소리지르고, 무보수 봉사 직이라며 불평을 쏟아 놓아서는 안될 일이다. 아무도 그들에게 억지로 선관위를 맡아 일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없다. 모두 스스로 자원 봉사하는 입장이라면 자신들의 일에 대한 성격과 무게를 알고 처신해야만 한다.
오랜만에 형식을 제대로 갖춘 선거가 주관조직의 미숙한 행정으로 얼룩지는 과오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다 면밀한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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