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몽과 계몽
전기가 또 나갔다. 요즘은 툭하면 단전이다. 예고도 없다. 그나마 밥숟가락 들고 있을 때는 봐주는 게 다행이다. 우기가 예년 보다 늦게 찾아와 중부 고원지방의 수력발전량이 줄어서 그렇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건기가 지속된 만큼 예년보다 날씨가 덥다는 게 원인인 것 같다. 베트남 사람들도 더우면 에어컨 켠다. 경제가 발전하는 만큼 소득규모도 커져 집집마다 냉장고 에어컨 갖추며 살기 시작했는데, 전력사업은 십년지대계라서 당장에 전력수요가 늘었다고 해서 그만큼의 공급이 바로 가능하지 않다는 게 요즘 들어 부쩍 단전이 잦아지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에어컨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도 있는 집 사람들은 여름에 찬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북미대륙 평원인디언 족장이었던 ‘앉은 황소(,Sitting Bull 1831~1890)’가 백인과의 기나긴 전쟁에서 백기를 들고 문명세계로 나왔을 때, 처음으로 아이스크림 맛을 보고 나서 찬탄을 마지 않았다고 했다는데, 한여름에 눈덩이는 석기시대 사람이었던 그에게 마술과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문명세계에서도 철 지난 얼음은 귀한 것으로서, 얼음이 녹기 전에 추운 곳에서 더운 곳으로 재빠르게 가져다 놓는 것이 한여름에도 찬 음식을 가능하도록 했던 비결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는 장거리 육상 교통수단으로서 증기기관차를 이용했다. 그런데 증기기관차와 에어컨 냉장고는 작동 원리가 같다. 증기기관차는 물에 열을 가하여 발생하는 증기압으로 차륜을 구동시키는 방식이고, 냉장고나 에어컨은 거꾸로 기체 상태인 냉매를 기계적인 방식으로 압축하여 액화시켰다가 이를 자연상태(상대적으로 압력이 낮은 곳)에서 팽창시켜 기체상태로 되돌아가게 할 때 주변의 열을 흡수케 하여 온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냉장고나 에어컨이 증기기관차보다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압축을 위한 장치로서 전동기와 제어장치 등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증기압이 동력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기원전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증기기관이 발명되어 실제로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기까지는 무려 1000년도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이 소요되었다.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같을 수 밖에 없는데 역사를 써내려 가며 쌓아 올린 물질문명은 옛 시절과 요즘 시절이 비교가 되질 않는다. 문명이란 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발전시켜온 인류 공동의 문화적 유산이기에 그렇다. 아무런 이유 없이 철기시대 사람이 석기시대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문명의 진행방향에는 오로지 퇴보 없는 진보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요즘 세상에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음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아니면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는 주장을 하면 어떻게 될까? 그와 같은 주장은 TV 쇼에서 개그맨들이 사람들 웃기려고 할 때나 하는 소리라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로 통한다. 요즘 사람들은 4~500년쯤 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천재나 꿰고 있었을 법한 천문지리나 과학법칙을 초등학교 졸업학력 정도의 상식으로 취급한다. 또, 한 3~400년쯤 전에 ‘라이프니츠’나 ‘뉴턴’ 같은 천재 수학자나 다룰 수 있었던 미분적분학은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배운다.
학교에서 수리학 같은 자연과목을 가르칠 때, 사회학 같은 인문과목도 함께 가르치는 것처럼, 물질문명의 발달사에 있어서 인문학적 발달과정은 결코 누락되거나 배제될 수 없는 중대 요소이다. 오히려 인문학적인 발달과정이 없었다면 자연과학 역시 아무런 진전이 없었을 것이다. 과학이란 근본적으로 철학의 한 분야이고, 고대 그리스로-로마시대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자연철학의 계보는 근대의 계몽주의 철학으로 이어져,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것에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것을 유리해 내는 탐구 방식을 찾아 내었고 그로써 과학이란 학문이 정립된 것이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사회체제에도 많은 변혁을 불러일으켰다. 물질문명이란 것이 보잘것없던 시절에 세상을 지배하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통치행위의 정당성을 신권에서 찾았다. 즉, 자신들은 신의 대리자로서 세상 모든 것을 좌우할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 받았으니 그렇지 못한 상서로운 것들은 덤비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은 민주주의 시대가 되어 권력을 위임한 주체가 절대자이자 초월자인 신으로부터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통사람들로 바뀌었다는 것이 다르다. 즉, 보통사람의 권한을 물려받았으니 평범한 정도의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 요즘 시절 대통령이다.
요즘 시절의 대통령과 옛 시절의 왕은 하는 일은 비슷해도 그 권한에 있어서는 180도 다르다. 대통령은 잘못을 저지르면 직위 해제를 당하기도 한다. 잘잘못이 뚜렷하게 없어도 사람들 눈밖에 났다는 이유 하나로 직무가 정지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 있었다. 지난 군사정권 시절에는 마음만 굴뚝 같았던 일이었는데, 막상 민선으로 민주적인 정부가 성립되자 권력을 잃은 군사정권의 후예들이 대통령 탄핵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렇게 옛날 일도 아니어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때 난생 처음으로 100만개의 촛불이 켜진 것을 보았다.
요즘은 신권통치의 시절도 아닌데 사람들이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권력자들이 정해준다. 이때, 믿지 못하겠다 반발하면 ‘허위사실 유포’라는 죄몫으로 ‘전기통신법’에 의거하여 처벌을 받는다. 허위사실을 퍼뜨리는 행위는 전기통신적인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현실적으로도 문명사회 중에 오로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죄가 되는 나라는 우리 나라 밖에 없다고 한다. 만일, 거짓말로 인해 죄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기죄’가 되거나 ‘명예훼손죄’가 되어야 한다. 우화에서도 양치기소년은 처벌받지 않는다.
특정 사안에 대하여 논란을 종식시키고 사람들을 믿게끔 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널리 알려진 보편적이며 타당한 방식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검증작업을 실시하면 되는 것이다. 유사 이래 지금까지 축적된 학문적 성취는 모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립된 것이다. 특히나 열 전달이나 금속의 강도와 같은 물상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결과가 확연하다. 만일 이가 전적으로 무시되고 강압적인 수단에 의한 눈먼 믿음만을 강요 받는다면, 우리 사회는 문명사회 가운데서 유일한 미개사회로 남게 될 것이다. 위정자들에게는 안됐지만 이는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 받아 죽임을 당했을 때, ‘갈릴레오’ 역시 지동설을 주장했다 하여 여생을 가택에서 연금생활을 해야 했다.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4~500년쯤은 전의 일이다. 만일 지금 누군가 권력자들이 하는 주장에 반대되는 주장을 공공연히 했다 하여 수사를 받아야 하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는 우리 시대의 ‘코페르니쿠스’가 될 것이고 ‘갈릴레오’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버젓이 발생하는 우리 시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사실성을 의심했던 ‘데카르트(1596~1650)’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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