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분쟁, 브렉시트, 보호주의, WTO균열, 안보명목, 메가FTA, 신FTA
도하라운드 좌초 이래 세계무역기구(WTO)의 다자(multilateral)무역체제 지탱 동력이 떨어지면서 지역무역협정과 분야별 복수국간 협정이 다층(multi-layered)적으로 통상질서를 이끌어갈 전망이다. 한국무역협회는 ‘2019-2020 통상이슈 점검 및 전망 : 무역협회가 뽑은 통상이슈 TOP 7’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처럼 밝혔다.
보고서에서는 ▷WTO의 위기와 도전 ▷떠오르는 메가 FTA ▷신시장과의 FTA 추진 ▷미중 통상분쟁 표면봉합 속 갈등 지속 ▷보호무역조치의 진화와 세계적 확산 ▷‘국가안보’의 무차별적 사용 ▷엑시트(출구) 없는 브렉시트 등을 통상 화두로 꼽았다.
●장기화된 미중분쟁, 통상변수 아닌 상수 = 본래 관세전쟁이 메인이던 미중 무역분쟁은 관세를 철회하기 위한 ‘딜’에도 불구하고 잦아드는 기색이 아니다. 겉으로는 관세 철폐를 위해 양측이 노력하는 것 같아도 미국은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거나 화웨이나 ZTE 등 개별기업에 대한 제재를 통해 비관세 영역으로 전장을 넓혀나가고 있다.
특히 미국은 기술패권 헤게모니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중국의 첨단기술 산업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할 것으로 보이며, 중국은 미국이 요구한 의제 중 자국 경제개방과 대외개방 기조에 부합하는 과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취사선택해나가고 있다. 이는 글로벌 서플라이체인의 재편과 함께 위기 속에서도 한국에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는 보고서에서 “우리 기업들은 미국에서는 중국 수입품의 시장점유율 저하에 따른 기회 요인 포착, 중국에서는 내수둔화에 따른 경기침체에 대비하는 ‘투트랙’ 전략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숨 가쁜 응급처치… WTO 살려야 한다 = 이처럼 보호무역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신흥국과 선진국 간 의견조율에 실패해 도하개발어젠다 타결이 지지부진한 WTO의 입지도 날로 좁아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괄타결방식의 어려움으로 인해 WTO에서는 환경상품, 서비스무역, 전자상거래, IT제품, 정부조달 등의 분야에서 복수국간 협정을 추진해와 일정 부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다자간의 단일협정보다는 일부 합의국 간 여러 협정이 공존하는 형태의 통상규범이 형성된 셈이다.
WTO는 지난 20여 년간 다자무역기구의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고,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보호무역주의와 자국우선주의로 돌아선 미국이 새로운 WTO 상소기구 위원 임명까지 거부하면서 WTO의 분쟁해결기능이 마비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올해 12월 이후 7명의 상소기구 위원 중 1명만 남게 되면 3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WTO 상소기구의 분쟁해결기능이 무력화될 수 있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분쟁에서 패배한 일본 등 일부 회원국이 상소기구 판결에 불만 위원 선임절차를 정치적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특히, 국가 간 무역분쟁을 해결하는 WTO 다자간 분쟁해결절차가 약화된 상황에서 무역구제조치가 확산되며 남용될 가능성이 커지고, 미국에서 시작된 ‘국가안보’를 근거로 한 자국경제주의(economic nationalism) 경향도 계속될 것으로 우려됐다.
●‘병균처럼’ 진화하며 퍼지는 보호무역주의 = 사실 미국은 보호무역주의 성향의 트럼프 정부 집권 이전부터 수입규제를 늘려나가는 추세였다. 반덤핑·상계관세 및 세이프가드 조치의 증가는 물론 특별시장상황(PMS) 등 무역확장법을 적용한 고율의 관세 부과로 우리나라 기업들도 많은 피해를 봤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조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개도국의 반덤핑조치와 세이프가드 남용 또한 빈번해지고 있으며, 유럽연합(EU) 또한 중국을 겨냥한 반덤핑 규정을 만드는 등 더욱 공격적인 통상정책을 펴고 있다.
●‘안보’ 핑계 무역제한조치 남용 = 미국은 수입자동차에 관세를 부과하는 무역확장법 232조에 ‘안보’를 이유로 대고 있으며, 중국 기업들에 대한 제재에도 중국으로의 정보 유출이 우려된다는 ‘안보’ 위협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 또한 이번에 대한국 수출규제를 시행하면서 내세운 명목이 ‘안보’ 문제였다. 대한국 수출 전략물자가 일본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인데, 그 근거가 희박해 사실상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불복하는 움직임이라는 평가다.
산업기술이 고도화되고 국가 간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하면서 기술 이전, 데이터 흐름과 같은 규제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외국인 직접 투자가 각국의 산업 정책에서 민감한 이슈가 되면서 국가 보상의 이유로 해당국의 산업을 보호‧육성하고 경쟁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경향이 심화될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보호주의에도 굴하지 않는 메가 FTA 조류 =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출범하기 직전까지만 했어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통상질서는 메가 FTA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경제 포위망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타결했으며, 유럽연합(EU)과 환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지 사흘 만에 TPP를 파기하고 EU와의 통상분쟁으로 TTIP도 사실상 엎어지게 되면서 메가 FTA 판도는 아시아-오세아니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됐다.
미국을 제외한 TPP 기참여 11개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모여 CPTTP를 타결했으며, 중국과 아세안이 주도하는 RCEP는 내년 발효될 전망이다. 또 일본은 EU와의 경제동반자협정을 발효하고 미국과도 무역협정에 타결하면서 우리나라에 뒤쳐졌던 FTA 시장을 빠르게 넓혀나가는 추세다.
한편, 미국의 경우 기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체할 미멕캐협정(USMCA)이 타결됐으나 현재 비준에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환율 문제나 정부의 시장개입 등을 더 세밀히 조율할 수 있는 양자간 협정을 다자간 협정보다 더 선호하는 경향이다.
●신흥시장 향해 나아가는 FTA = 우리나라의 첫 메가 FTA인 RCEP가 타결되면서 활용도가 낮았던 기존 한-아세안 FTA를 보완하고 역내 가치사슬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일본과는 새로 FTA를 체결하는 효과를 볼 수 있으나,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와 일제불매운동이 벌어지는 요즈음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이번 RCEP 타결이 한중일 FTA 진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 전망이다.
그간 선진국이나 인근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국가들에 치중돼있던 FTA 추진동력이 중남미와 아시아 중서부로 향하는 점도 긍정적이다.
브라질·아르헨티나 등이 참여하는 메르코수르와의 무역협정이 현재 추진 중이며, 태평양동맹과의 무역협상이 예정돼있고 중미 5개국과의 FTA가 발효를 앞두고 있다. 러시아·카자흐스탄 등이 참여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과의 협정도 추진 중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동 FTA인 이스라엘과의 무역협정도 타결된 바 있다. 아울러 브렉시트를 앞둔 영국과의 FTA도 관세협정 공백 없이 발효될 수 있을 전망이다.
●조기총선? 노딜브렉시트? 혼돈의 영국 = 이미 예정된 브렉시트 기한을 넘긴 영국은 의회와 행정부가 대립을 계속하며 불확실성만 악화를 거듭하고 있다. 본래 지난 3월 29일 시행됐어야 할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는 내년 1월로 미뤄졌으며 다음 달 영국은 조기총선을 치른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국경 처리 문제로 오랜 기간 EU와 마찰을 빚었던 영국은 지난달 17일 겨우 ‘백스톱’ 대안에 합의했으나 의회는 브렉시트 승인을 보류하고 ‘노딜 브렉시트 방지법’을 통과시키며 브렉시트를 또다시 연기시켰다. 향후 브렉시트 국면의 변화는 조기총선 향방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김영채 기자 wtrade0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