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카스트, 우리 안의 카스트
●인도 카스트의 과거 = 카스트(Caste). 조선의 반상제도, 서구의 노예제도 등 인류사에 수많은 신분제가 있었지만, 21세기 현재까지도 살아 숨 쉬는 인도의 신분제도다. 기원전 2000년 전후 중앙아시아에서 철제무기로 무장한 아리안 유목민이 남부로 이동, 인더스 강 주변에서 인류 4대문명의 하나를 꽃피운 드라비다 원주민을 정복하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한 종교·사회체제다.
지식과 제사를 담당하는 브라민(사제), 전쟁과 통치를 담당하는 크샤트리아(귀족), 상업과 농업에 특화된 바이샤(평민), 수공업 위주의 수드라(공인)의 4대 계급과 이에도 포함 못되는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로 대별된다. 조선조의 사농공상과 비슷하면서도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상농공’ 피라미드 신분체계다. 같은 카스트 내에서도 수백 이상의 서브 카스트가 있어 3000여 개의 세부 카스트가 존재하며 직업, 기능 분화와 상호간 위계도 엄격하다.
28개 주별로 각 계급별 구성비에 많은 편차가 있지만, 11억 힌두교 인구 중 불가촉천민이 약 16%, 수드라 25%, 맨 위의 브라만이 4%, 바이샤 내 상인집단인 바니야가 3%, 나머지 절반정도를 중간의 농민(바이샤)과 전사계급(크샤트리아)이 차지한다.
최상 브라민의 영향력은 아직도 절대적이다. 1947년 독립 이후 40여 년 집권해 온 네루(Nehru) 가문을 위시, 현대에 있어서도 인도 정치, 학문, 행정, 사법, 언론 분야에 절대적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다.
인도인 출신 11명의 역대 노벨상 수장자 중 인도의 시성 타고르(Tagor)와 각각 1998년,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Amartiya Sen), 아비지트 배너지(Abhijiit Banerjee)는 인도 북동부 벵갈 출신 브라민이다. 2009년 노벨화학상의 라마크리슈난(Ramakrishnan) 등 과학분야 3명의 노벨상 수상자, 영화 ‘무한대를 본 남자’의 주인공으로 현대 수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20세기 초의 라마누잔 모두 인도 남부 브라민이다.
마르와리(Marwari, 라자스탄 주), 구자라티(Gujarati, 구자라트 주)로 대표되는 인도 상인집단(바니아)은 인도 10대 재벌 중 아홉을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 제일 부호로 널리 알려진 무케시 암바니(Mukesh Ambani)는 구자라티이다. 인도 3대 전자상거래 기업 플립카트(Flipkart), 스냅딜(Snapdeal), 민트라(Myntra) 창업자는 모두 인도 최대 상인집단 마르와리 가문 출신이다. 약화되고 희석되는 추세이지만 현대 인도도 4%의 브라만(권력)과 3%의 바니아 그룹(금력)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들은 사상, 문화, 돈이란 핵심가치를 지배하고 있다.
인도 권력의 또 다른 축인 군대와 경찰의 고위 간부들은 카스트 내 전사 집단인 크샤트리아 출신의 비중이 압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인도 주요 도시 내 일상에서 접하는 청소부, 구두수선공, 짐꾼, 경비원은 수드라 내지 불가촉천민일 확률이 높다. 인도 인구의 60%가 거주하는 시골에서 카스트 문화와 전통은 아직도 강하다.
[인도의 현대 카스트]
●인도 카스트의 현재와 미래 = 인도 일류 호텔의 주방장에는 브라민 내에서도 상층 브라민인 샤르마(Sharma)가 많다. 낮은 계급이 한 요리는 먹지 않는 카스트 전통으로 요식업 계통에 브라만 출신이 많았지만, 이 샤르마는 일반 손님을 대해야 하는 호텔 내 직업공간과 퇴근 후 집안, 귀향한 고향 내에서의 상반된 전통적 역할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인도 어느 도시에 가도 ‘아가르왈(Agarwal)’이란 이름을 수없이 접하게 된다. 인도 상인집단 내 본류 중의 본류임을 자부하는 마르와리 내에서도 핵심그룹이다. 수천 년 무역, 금융, 상업 특화 전통에 맞추어 대부분이 창업이나 사업 쪽에 종사하지만, 최근에는 열린 문과 다른 가치를 찾아 학계, 회계사, 변호사 등 전문직, 공직에 진출한 아가르왈을 만나는 일은 흔하다.
인도 근현대 사회적 격변기 중 적응과 변화를 잘 못한 그룹이 크샤트리야 계급이다. 무사 전통집안의 타코르(Mr. Thakor)는 아버지와 3형제 모두 운전에 종사하고 있다. 가산을 탕진한 할아버지 때의 영화를 회복하기 위한 그와 아내의 최우선 순위는 6살 외동아들을 자신이 다닌 그저 그런 8학년 의무 공교육이 아닌 무상 영어 사립학교와 대학에 보내는 일이다.
아쇼크는 인도에서도 가장 못 사는 주로 알려진 북부 비하르(Bihar) 주에서 대대로 구두수선 일에 종사해 오던 불가촉천민이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고향을 떠나 수도 델리 인근 주택가 입구에 가설 구두수선점을 12년째 운영하고 있다. 고향에 남겨둔 딸 셋을 사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휴일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47년 독립헌법에서 카스트로 인한 차별은 철폐되었다. 오히려 현재 인도에는 ‘Ministry of Social Justice and Women Empowerment(사회정의여성복지부)’라는 인도 특유의 중앙부처를 신설해 차별받아 온 하위 카스트의 교육과 복지확대를 위한 제도를 개발, 시행하고 있다.
주별로 중하위 카스트를 분류하고 있는데 크게 ST(Scheduled Tribe), SC(Scheduled Caste), OBC(Other Backward Caste)가 있다.
ST는 인도 북동부의 몽골티벳계 등 인도 전역에 분포된 소수민족 집단이다. SC는 불가촉천민으로 불리는 달리트 계급이고, OBC는 수공업에 종사하던 수드라를 위주로 경제, 사회적 지위가 급속히 추락한 일부 크샤트리아 계급이다. 이 ST, SC, OBC는 추가하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SC, ST, OBC별 가산점은 차이가 있지만 이들 3개 그룹에 속하고 소득, 자산이 일정 기준에 미달할 경우, 사립학교 쿼터 배정 및 무료교육, 대학입시, 공기업 및 정부관리 임용에 있어 상대적으로 수월한 쿼터 내 경쟁을 시키고 있다.
이 같은 지원책과 의무교육 확대, 소득 증가, 돈과 직업이 거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도시화 진전으로 현대 인도의 카스트 영향력은 지속 우하향 추세다. 이미 천민 출신 대통령을 배출했고, 중·고위 공직에서 이들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인도 국회의원도 구성비 1/4에 맞추어 약 130석이 SC, ST에 배정되어 있다.
●내 안의 카스트, 우리 안의 카스트 = 사람 인(人)자가 의미하듯 혼자서의 사람이란 의미도 없고 힘도 없고 도덕도 불요하다. 원시 인류의 사냥처럼 한정된 사냥감을 효율적으로 사냥하고 지켜내기 위해서는 같은 집단 내 연대와 유기적 분업 정도는 사냥의 성패와 양을 좌우했다. 인간이 동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절대적 경쟁력이다. 지연, 학연, 직연 등도 따지고 보면 불완전한 인간이 동류라는 본연의 감정에 더해 한정된 목표나 가치로부터 나와 우리에게 할당될 몫을 키우기 위한 근·현대판 연대본능이며, 개인적 소집단 관점에서의 최적화 모델이고, 발전의 원동력일 수도 있다.
인도 상인집단, 똑똑하고 대국적인 시각의 대학생들, 바늘구멍을 통과한 인도 고위공무원단과 불가촉천민 출신의 구두수선 명인 속에서 한 분야, 한 직업에 한평생 몰두케 하고 동류집단끼리 끈끈한 공동체 문화를 형성했을 때의 그 무서움을 수없이 보았다.
제도화, 고착화, 밖에 대한 획일적 차별화가 문제다.
우리나라 면적의 50배에 달하는 이 인도아대륙의 5000년 역사에서 현재의 인도 이전에는 진정한 통일 민족국가가 없었다. 외침만 받아왔지 밖으로 뻗어나간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도 인도 카스트의 제도화, 고착화가 가져다 준 내적 분열과 사회적 동력의 약화가 주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인도는 하나의 국가로 탄생한 지, 그리고 카스트 제도가 철폐된 지 70여년을 지나고 있다. 인도 정부와 시민집단, 깨인 지도층의 계몽노력, 경제발전과 도시화로 판 자체가 뒤틀리고 있고 변화의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다. G2 인도 이야기의 뿌리다.
정체성 확립과 분업이란 넓고 순환적인 의미로 이해, 합의될 수 있다면 기능적 카스트는 자신과 사회의 발전 큰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칼 포퍼류의 열린사회에 반하는 제도화, 고착화, 닫힌 사회화가 문제다. 내 안에도, 우리 안에도 수많은 카스트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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