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넘어 경제 중심이 된 북인도
●북인도 : 이민족의 투쟁, 정치·행정의 본고장 = 북인도는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정치, 행정, 전쟁의 고장이다. 이곳에 기원을 둔 인도인들 대부분이 이러한 환경과 역사에 적응되어 있다.
“신뢰성이 떨어진다. 말과 약속을 자주 바꾼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거래보다 단기의 이익을 너무 좇는다. 말이 너무 많다.”
한국 기업인은 물론 인도에 진출해 있거나, 거래 경험이 있는 외국 기업인들, 그리고 인도 내 타 지역 사람들이 바라보는 북인도인, 특히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필자 소견으로는 북인도의 역사적, 지리적 환경의 산물이고 이 환경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적응과 생존노력이 이러한 평과 연결되지 않나 싶다.
우선 북인도, 특히 중부 히말리야에서 갠지즈 강과 인더스 강이 갈라져 화살 촉 끝 모양으로 관통하는, 우리나라 10배를 넘는 대평야 지대는 중국 황하 유역과 함께 고래부터 농업생산성이 세계 최고이고 그래서 인구 초고밀도 지역이다. 밀농사의 3배 생산성으로 벼의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곳의 잉여와 영화를 놓고 벌이는 인도 토종 왕조 간 투쟁도 격렬했다. 특히 기원전 4세기부터 17세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그리스,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몽골, 그리고 무슬림 무굴에 이르기까지 북서쪽 세력의 대인도 침략로는 페르시아→ 카이버 고개(또는 잠무 카시미르 회랑) → 펀잡 → 델리의 북인도 지역이었다.
이 경로에 자리 잡은 인도아대륙의 지배계급, 상인, 일반 대중의 적응 방식은 적자생존, 각자도생, 또는 집단도생일 수밖에 없었다. 한 복판에 위치한 펀잡(Punjab)과 카시미르(Kashimir)가 인도 전사 집단의 본고장이자 북인도의 중심집단 역할을 하는 이유다.
지금도 인도와 파키스탄 장교계급의 핵심이 펀자비(Punjabi)이고, 힌두와 이슬람 교리를 통합한 시크교가 이곳에서 탄생하고 번성했다.
정도 차이일 뿐이라고 혹자는 말하지만, 북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펀잡 상인들의 잡초 같은 경쟁력과 단기 이익에 집착하는 성향,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이동성향을 이러한 북인도의 정치, 역사, 문화적 배경에서 설명하는 이가 많다.
●북인도 변하고 있다… ‘델리차사’에서 인도 3대 제조업 기지로 = 필자가 처음 인도에 근무할 당시인 2000년도 전후의 뉴델리와 인근, 그리고 최근 3년간 현지에서 본 북인도 및 이곳 사람들 양태는 천양지차다.
당시 서부 경제수도 뭄바이는 민간 대기업 타타파워(Tata Power)가 제공하는 전기가 24시간 들어 왔고 금융, 물류는 물론 제조기업은 뭄바이 및 위성도시 푸네(Pune)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
반면 수도 뉴델리의 주요 주택가에 하루 3~4시간만 전기가 공급되는 반면, 뉴델리 시내 요지인 디펜스 콜로니(Defence Colony) 등 전현직 군인들 거주지는 24시간 전기가 공급되고 있었다. 언제 다시 청구될지 모르는 전기요금 고지서와 세금 리스크로 4~5년 치 영수증을 별도 보관해야 했다.
관공서를 가도, 이런 갑을 문화에 익숙해진 기업에 가도, 기업인들을 만나도 “간 것은 있어도 돈이든, 서비스든, 마음의 응대든 오는 것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함흥차사’에 빗대어 말하면 ‘델리차사’였다. 관존민비(官尊民卑) 시대였다.
그러나 필자가 올 여름 다시 방문한 뉴델리, 위성도시 구르가온(Gurugaon), 노이다(Noida) 등 NCR(Northern Capital Region) 지역 및 사람들만 놓고 본다면 동남아 어느 도시 못지 않은 외관과 인프라를 자랑한다. 델리 시내를 운항 중인 지하철 노선만 옐로, 핑크 등 10개 라인이다.
20년간 개인소득이 3배 이상 늘었고, 외국의 사례를 접하게 된 현지 주민들의 경제, 정치적 영향력이 몰라보게 성장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의사를 표출하고 표에 목숨을 거는 시의원, 주의원, 주지사, 연방 의원실에 문제를 제기한다.
연간 150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있는 인도의 IT, 소프트웨어 산업과 생활 깊숙이 침투한 SNS, 결제수단, 메신저 등을 통해 관련 소식이 순식간에 전파되고, 정치, 행정권에 대한 항의, 정책 제안도 유사 이래 가장 활발하고 강력하다.
그동안 만들면 팔던 시대에서 소비자가 왕이고 소비자의 선택이 운명을 좌우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우버(Uber), 올라(Ola) 등 콜 택시 이용 시 그 동안의 종합평점을 보고 기사를 선택하고, 호텔이나 모텔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20여 년 전 고무줄이던 요금과 만성화된 팁을 요구하다가는, 부실 서비스로 어느 화난 모텔 고객이 평점을 낮게 주면 당장 그 기사나 모텔의 영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주변에 산재한 허름한 야채가게를 가도 PhonePe 등 모바일 결제 앱이 안 되는 곳은 소비자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상장 전 기업 평가가치가 10억 달러를 넘는 인도의 유니콘 기업수가 경제규모가 5배인 중국의 절반인 108개사에 달한다.
PhonePe, Razorpay, Flipkart, BYJUS, Unacademy, Ola, OYO Rooms 등 대부분이 소비자의 선택과 기호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받는 업종, 분야다. 이들 근거지의 많은 부분이 중남부 벵갈루루이지만 NCR 지역은 인도 유니콘 및 스타트업의 3대 성지로 급성장했다.
국제적인 상관행과 급변하는 소비자 기호와 선택에 적응하지 못하면 성장은커녕 생존이 어려울 정도로 북인도 상인들도, 소비자도 변하고 있다.
수도 뉴델리 및 인근 위성지역은 스즈키, 혼다, 마힌드라 등 자동차 기업들과 코카콜라, 펩시, 삼성전자, LG전자, 에릭슨, 소니 등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공장이 투자한 제조업 및 소비중심지로 탈바꿈되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외국기업 대부분은 수도 뉴델리에 지점, 지사를 두고 있다.
●북인도 거래, 시간 싸움, 협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 그래도 아직 관성이 있고, 인도상인 특유의 상술이 살아 숨 쉰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각별히 유념을 해야 한다.
우선 시간관념이다. 우리가 발전한 원동력이고 경쟁력의 핵심인 시간, 약속관리이지만 북인도 사람들의 시간관념과 진폭은 우리와 다르다. ‘어제와 내일’, ‘그저께와 모래’의 힌디어 단어가 동일한 데서 보듯이 인도인의 시간관념은 윤회적이고 곡선적이다. 서두르지 않는다.
협상과정상 우리의 조급함과 시간관념으로 접근하면 중간에 내 간이 녹는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관행대비 최소 3배 시간을 거래, 협상의 전과정에 곱해놓고 기다려야 한다.
정가가 없다는 점에 명심해야 한다. 인도, 특히 북인도 상인은 일반 상점이든, 대기업이든 일단 가격협상에 들어가면 “네가 원하는 가격을 먼저 제시하라”고 한다. 나오는 대답에 따라, 또는 상대방의 기세와 차림에 따라 자신의 가격을 제시한다. 신사적인 상관행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가 자기 기준 20~30% 낮춰 부를 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가격도, 여타 조건도 처음에 엉터리일 정도로 낮추어 부르는 것이 지름길이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내가 제시한 가격과 인도 상대방이 제시한 가격의 중간정도를 향한 지난한 협상 과정이 시작된다. 가격이든, 기타 조건이든 중간 과정에 인도 측 조건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시늉을 하면, 십중팔구는 손을 잡고 협상을 하자고 하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고 경험이다.
결제조건도, 기타 계약 이행과정에서 인도 상인을 컨트롤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의 끈을 거래가 끝나고 서비스가 완료될 때가지 확보해 두는 것을 추천한다. 상품인도가 끝나도 추가로 받을 A/S 등이 있으면 최소 그 부분만큼 남겨두어야 한다.
말과 글의 수용도 차이가 천양지차이므로 계약서의 예비조항을 철저히 점검하고, 협상과정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기업 내 상사, 또는 영향력을 끼칠만한 인도 공무원과의 원활한 협조, 네트워크 부분을 조금 과장해서라도 보여 주면 좋다.
결제 방식에서도 D/P(Documents Against Payment) 및 D/A(Documents Against Acceptance)와 같은 외상 거래나 수입 시 과도한 선도금 지급의 대부분이 불미스럽고 고통스러운 결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