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둘러싼 무역환경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주요국의 경기 둔화로 해외시장에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을 둘러싼 미국-중국 갈등은 3차 세계대전이 이미 시작된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는 공급망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달러화가 독주하는 가운데 원/달러 환율이 급속히 오르고 있지만 경쟁국 통화 가치도 함께 떨어져 수출경쟁력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반면 원자재 등 수입에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가졌던 중화학·첨단제품들마저 중국에 추월당하고 있다.
주요국 경기 둔화로 해외시장에 먹구름
러우전쟁·대만사태, 3차 세계대전 위험
전세계 휩쓰는 가뭄·홍수에 공급망 위기
환율급등, 수출 도움 안 되고 수입 부담
첨단제품마저 후발개도국들에 추격당해
●급격하게 나빠지는 해외시장 환경 = 외신과 관련업계에 따르면 독일을 비롯한 유럽경제는 이미 역성장 단계에 접어들었다.
8월 24일 발표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8월 S&P글로벌(옛 마킷) 제조업·서비스업 합성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9.2로 전달(49.9)보다 대폭 떨어졌다. PMI는 매달 기업의 구매담당 임원에게 현재 기업 상황과 앞으로의 경기 흐름에 대해 설문조사를 해 집계하는 경기 지표다. PMI가 50을 웃돌면 경기 확장을, 밑돌면 경기 위축을 뜻한다.
유로존의 제조업 생산은 석 달 내리 줄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유로존 경제가 이미 침체 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아울러 올 4·4분기에도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비관하고 있다.
미국 경제는 하강 움직임이 뚜렷하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분기 -1.6%에 이어 2분기에도 -0.9%를 기록했다. 통상적인 경기침체 기준인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이다.
인플레이션 역시 소폭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공행진이 멈추지 않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물가를 잡기 위해 고강도 금리인상을 지속하면서 미 경제가 결국 침체로 빠져들 것이란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세계 경제의 성장엔진 역할을 해왔던 중국은 엔진이 식고 있다. 4~6월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면서 경제수도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들이 봉쇄됐던 충격이 크다. 2분기 GDP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고작 0.4% 증가하는데 그쳤다.
경기둔화로 알리바바, 텐센트, 징동닷컴 등 대기업들이 최대 15% 인력 감축에 돌입하는 등 기업들의 감원이 잇따르면서 중국 실업률도 폭등하고 있다. 16~24세 청년층 실업률은 7월 20%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급격한 환율 상승압력 속에 신흥국들은 외환보유고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이후 가장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들의 외환보유고 총액은 올해 1∼6월 3790억 달러(약 509조 원) 줄어들었다.
신흥국과 개도국이 경제 위기에 처하면 한국 상품을 실은 수출선은 바다 위를 떠돌거나 되돌아와야 한다.
●3차 세계대전 시작됐나 = 개전 6개월을 넘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대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일촉즉발 상황이다.
먼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나라의 전쟁을 넘어섰다. 유럽연합(EU)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가세해 3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다. 이 전쟁은 이미 장기전으로 접어들었고, 양쪽 누구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 전쟁으로 러시아에 대한 EU와 미국의 제재가 강화되면서 세계경제에 주름이 지고 있다. 국제 원자재 공급망 혼란과 가격 급등,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진행 중이다.
한국 경제도 이 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심화되고 있고 8월 말 현재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 역시 3차 세계대전의 전운을 드리우고 있다. 미국의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어쩌면 역사를 바꾸는 ‘트리거’로 남을지 모른다.
유럽과 일본의 고위 정치인들도 잇달아 대만을 방문하고 있고, 중국은 이를 계기로 대만 침공 연습을 진행 중이다. 중국이 대만 침공을 실행하면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대만을 둘러싼 긴장 역시 세계경제에 주름을 지우기 시작했다. 미국은 일종의 반도체 동맹인 ‘칩4’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 하고 한국은 여기에 끌려들어가고 있다. 이는 ‘제2의 사드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경제의 시름은 깊어진다.
적의 적은 동지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과 그의 동맹들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동지가 됐다. 지난 2월 4일 푸틴과 시진핑 주석은 정상회담을 갖고 “나토의 동진에 반대하며, 중러 동맹에는 어떠한 제약도, 금기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전개된 러우 전쟁과 대만 사태는 두 나라의 동맹을 강화시키고 있으며 이는 세계대전의 위험을 높이고 있다.
이런 국제관계 변화는 ‘줄서기’를 강요하면서, 경제 동맹을 강화하는 미국과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 사이에 낀 우리나라의 고심을 깊게 하고 있다.
●갈수록 높아지는 통상 파고 = 경제 문제 앞에서는 동맹도 필요 없다. 얼마 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안(IRA)’에 서명했다. 미국이 북미에서 만든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내용의 이 법을 시행하면 매년 10만여 대 규모의 한국산 전기차 수출이 차질을 빚을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한국산도 보조금 지급 대상에 포함시켜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지만 미국은 들어줄 생각이 없다.
EU는 새 배터리 규제안의 법제화를 추진한다. 배터리의 생산·이용·폐기·재사용·재활용에 걸친 생애주기 정보를 디지털화해 배터리의 안전성을 높이고 책임 있는 재활용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이른바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 제도로, 2026년 시행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배터리 순환경제 구축을 위해 우리나라도 디지털 이력추적을 위한 시스템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이력 추적이 배터리뿐만 아니라 모든 상품으로 확대될 전망이어서 공급망 내 참여기업들은 재활용 및 이에스지(ESG) 이행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인도, 중국 같은 거대시장들도 수입규제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산 제품에 대한 주요국들의 수입규제 조치는 3년 반 동안 연속으로 반년 기준 200건을 넘기고 있다. 올해 상반기 한국산 제품에 대한 반덤핑 조치는 151건, 세이프가드는 47건, 상계관세는 10건이었다. 국별로는 미국, 인도, 중국 순으로 많다.
유가는 다소 안정됐지만 가스가격은 여전히 높은 가운데, 에너지 부국인 노르웨이와 호주가 자국 수요 충족을 위해 에너지 수출 제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최근 니켈에 수출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환율 급등… 수출 도움 안 되고 수입에 부담 = 환율 역시 한국무역, 나아가 한국경제에 주름을 지우고 있다. 8월 하순 현재 환율은 달러당 1340원 대에서 형성되고 있다. 환율이 1340원 대를 기록한 것은 13년 만이다.
환율의 고공행진은 예전처럼 수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베트남 공장에서 만든 스마트폰을 현지에서 수출하는 것처럼, 많은 기업들의 해외 현지생산 및 수출이 늘었고 이는 원/달러 환율의 영향을 매우 적게 받거나 거의 받지 않게 된다.
또 현재의 환율 상승은 미국 달러화의 독주 속이 이뤄지는 것으로서, 경쟁국인 일본의 엔화나 EU의 유로화를 비롯해 대부분의 세계 통화가 동반 약세를 보이고 있어 환율 상승에 따른 가격경쟁력 향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원자재 등의 수입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무역의 특성상 환율 상승은 수입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수출채산성에 악영향을 미친다.
또 식량이나 생필품 등의 수입가격 상승을 유발해 인플레 압력을 높인다. 한국은행은 올해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이 5.2%로 24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원유나 가스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의 고공행진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는 환율 상승은 무역적자 확대의 원인이 된다. 월간 기준 우리나라 무역수지는 작년 12월에 20개월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올해 들어 2~3월에 소폭 흑자 전환했다가 4월부터 다시 적자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8월 1~20일 무역수지는 102억1700만 달러 적자다. 연간 누계로 보면 올해 1월 1일부터 현재까지 254억7000만 달러 적자다.
●빨라지는 후발국들의 추격 = 이런 가운데 후발 개도국들은 강력한 경쟁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최근 20~30년 동안 기술력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한국의 수출품들을 중국 시장은 물론 세계 시장에서 밀어내고 있다.
거시경제, 인프라 등 다양한 분야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IMD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중국은 지난해 17위로, 한국(27위)을 제쳤다. 제조업 경쟁력 순위인 UN산업개발기구(UNIDO) CIP 지수도 중국은 지난 2020년 세계 2위, 한국은 5위다.
세계 수출시장에서의 점유율 1위 품목도 2020년 기준 중국이 1798개로 한국(77개)의 23배다. 한국은 1위 품목 수가 1993년 96개에서 오히려 줄었다.
중국시장에서도 한국 제품은 밀려나고 있다. 한국의 중간재를 수입해 제3국에 수출하던 중국은 이제 한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국가가 됐다. 우리 주력 수출 품목이던 자동차 부품의 경우 이미 양국 교역 관계가 역전됐다.
수출은 2010년 40억 달러에서 지난해 18억 달러로 감소한 반면, 수입은 같은 기간 12억 달러에서 22억 달러로 늘어 4억 달러 적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