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기준 중국에 등록된 중소영세기업수는 5200만 개로 2018년 대비 51%가 늘어났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인데도 작년 한 해에만 매일 2만3800여 개 중소기업이 새로 생겨난 셈이다.
중소기업은 중국 세수의 50% 이상, GDP의 60% 이상, 기술혁신의 70% 이상, 도시 일자리 창출의 8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에 자영업자인 개체 공상호(个体户) 1억1000만 개까지 합치면 중국시장 핵심 경제주체의 90%가 민영 중소기업인 셈이다.
그러나 지난 제로코로나 봉쇄정책으로 산업공급망 붕괴 및 소비위축의 대내적 요인에 미중 충돌과 글로벌 경기침체 등 대외적 요인이 더해지면서 기업들의 성장은 더욱 악화됐다. 이에 다급해진 중국정부가 핵심 경제주체인 민영 중소기업 살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모양새다.
특히 중국 기술혁신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 지원을 통해 청년 실업률을 해소하고,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에 맞서 중국 자체 ‘홍색공급망(Red Supply Chain)’ 구축을 본격화하고 있다.
홍색공급망은 중국정부 주도 아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 생태계를 구축하여 자국산 중심의 공급체인망을 만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홍색공급망 구축을 위해 정부가 야심차게 운영 중인 융통발전(融通发展)과 백장만기(百场万企) 정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융통발전’ 정책이다. 융통발전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상호협업과 소통, 기술교류를 통해 대기업-중소기업의 공동발전을 모색한다는 의미다.
미중 간 기술패권 다툼이 본격화되던 2019년 중국정부는 <대기업-중소기업간 융통발전 행동계획>을 발표했고, 이를 기반으로 산업별, 기술별 세분화해 대기업-중소기업간 개방형 혁신협력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정부 자체적으로 대기업-중소기업 간 융통발전 행동계획을 발표하며 중소혁신기업 육성을 가속하고 있다. 대기업의 풍부한 경영자금 및 생산인프라, 데이터, 기술자원을 중소기업에게 제공하고, 중소기업은 급변하는 산업 트렌드, 기술업그레이드 및 혁신성과물을 혁신사슬-공급사슬-데이터 사슬에서 대기업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실시간 공유하는 시스템 구축을 통해 상생 발전하는 방식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업무 재량을 위임하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시스템 속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의욕과 성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권한 부여, 권한 이양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 구조를 정부가 직접 나서 구축하는 셈이다. 이른바 ‘홍색 개방형 혁신(Red Open Innovation)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백장만기(百场万企)’ 정책이다. 백장만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인재∙자금∙기술 등의 매칭 활동 프로그램을 일컫는 말이다.
공업신식화부∙국유자산위원회∙공상업연합회 등 3개부서 공동으로 기술의 업스트림-미들스트림-다운스트림 및 대기업-중소기업간의 융합 혁신발전을 확대하기 위해 2022년부터 백장만기 프로그램을 공동 조직해 운영해 오고 있다.
2022년 기준 백장만기 프로젝트를 통해 110여 개의 대기업과 1200개 이상의 전정특신(專精特新:전문성·정밀성·독창성·혁신성) 중소기업이 매칭되어 2000개가 넘는 기술혁신성과를 이루었다. 백장만기 프로그램이 올해부터 지방정부로 확산하면서 그 혁신성과도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백장만기는 융통발전과 함께 대표적인 홍색공급망 재편 전략으로 우리 정부와 기업들의 지속적이고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해 보인다. 중국정부는 향후 3개 주관부서 뿐만 아니라 관련 대학∙연구기관∙금융기관 등의 광범위한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대기업-중소기업 융통혁신 생태계를 개선한다는 방침이다.
결국, 백장만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보 비대칭 이슈 해결을 위해 기술혁신, 제품 매칭, 시장개척 등 분야에서 대기업-중소기업 간 협력을 촉진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은 자국산 기술육성을 위한 홍색공급망 구축을 더욱 강화해 나가며, 성장의 모멘텀을 국유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의 빠른 혁신성장 생태계를 키우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구축에 대항해 중국은 정부 주도 아래 대기업-중소기업의 홍색속도혁신(Red Speed Innovation)을 더욱 가속해나갈 것이다.
중국은 지난 중국제조 2025에 포함된 10대 중점전략산업을 중심으로 정부(공산당)-국영기업-민영중소기업의 3박자 혁신생태계 구축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부가 첨단기술영역의 국영기업과 민영중소기업 간 비즈니스 매칭과 전후방 산업기술 생태계를 직접 이어주고 자금‧정책‧시장까지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혁신성장방식의 변화는 고스란히 우리 기업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 디스플레이 산업의 홍색 개방형 혁신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중국 디스플레이 산업은 지난 2014년 정부 전략산업으로 지정되고 5년 만에 삼성과 LG 디스플레이 등 우리기업을 제치고 LCD 분야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올랐다. 나아가 OLED, QLED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 자리까지 노리고 있다.
BOE(경동방)는 중국 디스플레이 최대기업인데, 안후이성 허페이에 가면 BOE의 B9(10.5세대) 공장이 있다. 2018년 신설된 이 공장은 총사업비 400억 위안(약 7조원)의 자금이 투입되었지만 BOE가 자체 조달한 비용은 20억 위안(약 3,500억 원) 5% 정도에 불과하다. 55%는 국유자본이 투자했고 40%는 국유은행이 대출을 통해 지원했다. 전형적인 중국식 전략산업과 기업 육성방식이다.
여기에 최근 새로운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과거와 같이 정책과 자금지원을 넘어 정부가 직접 나서 비즈니스 매칭까지 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BOE 디스플레이 공장 설립시 외국산 SW 및 장비기업 비중을 줄이고 국산제품 비중을 점차 늘려나가도록 정부가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BOE의 지난 베이징∙청두∙우한 등 8개 도시의 디스플레이 14개 라인 공장 설립 당시 한국 SW 및 장비기업들이 공사에 참여한 바 있다. 그러나 안후이성 허페이 공장부터 우리 기업들의 참여 수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중국정부의 융통발전 방침 아래 우리 기업들이 하나둘씩 빠지고 중국 중소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융통발전과 백장만기 정책으로 인해 향후 홍색공급망 구축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그에 따라 우리 대중국 수출의 거의 80%를 차지하는 부품∙소재∙장비산업은 직간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급변하는 중국 홍색공급망 구축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양국 간 치열하게 펼쳐질 산업기술경쟁에 대비하고, 이와 동시에 한중상호협력이 가능한 산업기술과 우리 경쟁우위 기술을 지속해서 발굴해 나가는 노력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