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현대사

kimswed 2009.06.21 10:59 조회 수 : 1511 추천:423



20세기 베트남 현대사 후편

미국의 경제봉쇄와 ‘도이머이’ - 도이머이란 Đổi (바꾸다)와 Mới (새롭게)의 합성어로 ‘새롭게 개혁한다’는 의미임 -
20세기 베트남 현대사는 한 마디로 미국과 서방의 철저한 경제봉쇄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2 ~ 6차 경제개발계획, ‘도이머이’ 등과 같은 경제·정치개혁을 시도함으로써 국가의 번영과 현대화를 추구해온 베트남인들의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자존심 구긴 미국, 베트남 ‘경제원천봉쇄’
한국전쟁에서 생겨난 새로운 군사용어가 ‘초토화 작전’이었다면 베트남전에서는 ‘융단폭격’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융단을 깔듯이 폭격을 했다는 의미인데 사실상 비용은 많이 들고 효율은 낮았다. 위험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융단폭격을 한 것은 분명 고의적인 학살인 것이다. 1965년부터 사용한 폭탄 양은 제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총 폭탄 양을 합한 것의 1.5배를 사용하였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7,200억 달러 (당시 한국의 1년 예산은 10억 달러 정도)라는 천문학적인 전비를 뿌려댔지만 베트남은 미국을 이긴 댓가를 톡톡히 치러냈다. 즉 미국의 자존심을 마구 구긴 댓가로 이때부터 베트남은 27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철저하게 경제적 보복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한 미국 역시 1971년 달러를 평가절하하고 그때까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금태환 중지 조치를 취하자, 국제통화체계가 크게 동요하고 국제 금융 혼란이 닥쳤으며,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도이머이 이전 시기
흔히 도이머이로 알려진 개혁노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까지 베트남의 사회주의 발전과정은 2차 5개년 계획(1976∼ 1980)과 3차 5개년 계획(1981∼1985)의 두 단계로 구분된다.

2차 5개년 계획 (1976 ~80)
-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
2차 5개년 계획의 기본방향은 국내시장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국유화와 집단화였다. 이에 따라 1978년부터 농업집단화가 본격화되었고 민간기업이 흡수통합되었으며 유통과 분배부문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성과는 상당히 미약했다. 1975년의 국민소득은 46억 8천만 달러였으나 80년에는 48억 9천 백만 달러로 거의 정체되었고 동기간의 1인당 국민소득도 98달러에서 91달러로 감소되었다. 또한 2차 5개년 계획 중 성장률은 1.5%에 불과했다. 또한 저조한 식량생산은 전형적인 곡창지대인 메콩델타가 자연재해에 놓여 있었고, 78년부터 본격적으로 단행된 농업집단화에 남부농가들이 반발하여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2차 5개년 계획의 실패는 “캄푸치아분쟁, 중국과의 분쟁, 미국의 경제봉쇄에도 기인된다. 특히 인접국가와의 분쟁은 국방비를 과다하게 지출하도록 했고 중 베트남분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원조를 상실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미국의 경제봉쇄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을 매개로 한 서방차관의 도입을 금지시켜 재정부족을 초래하게 하였다”는 사실이 근본 원인이었다.

3차 5개년 계획(1981 ~ 1985)
- ‘신경제정책’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1979년 제6차 공산당 중앙위원회 (팜반동 체제)에서 이른바 ‘신경제정책’이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화를 유보하고 농업과 공업부문에 자본주의적 유인책을 도입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즉 사회주의화의 과도기에 민간기업의 활동을 인정하고 수공업부문과 경공업부문에 경영자율성을 부여하기 시작했으며, 남부에 대한 농업집단화는 1980년까지 유보되었으며 보다 융통성있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당시 신경제정책에 따라 정부가 소비재생산을 장려하고 유통부문에 대한 통제를 완화했지만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은 생산증대의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합의가격을 현실화하고 이에 맞추어 임금인상을 단행한 것에 기인한다. 그 결과 베트남 정부는 1983년부터 허겁지겁 분배와 유통을 재통제하고 농업집단화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재통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욱 악화시켰다. 즉, 이전의 효율성 저하와 생산성 하락과 같은 문제가 다시 표출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적 유인책을 도입하여 경제적 정체를 극복하고자 했던 3차 5개년 계획의 경험은 단기적, 부분적인 개혁조치와 통제정책만으로는 베트남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본격적인 구조개혁의 도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도이머이 정책 본격화: 1986년 이후
1986년 12월의 제6차 당대회는 베트남의 경제개혁에 있어서 대전환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른바 ‘도이머이’라고 불리우는 개혁노선이 채택되면서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기 시작했다.
당시 윙반린 체제가 시장원리에 입각한 상품경제 수립을 목표로 우선적으로 착수한 것은 경제성장의 촉진을 위해 관료적 족쇄를 철폐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생산과 유통부문에 대한 관료의 장악은 뇌물과 부패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비효율성을 초래하였다. 또한 농업부문에 있어서 생산촉진을 위해 생산책임이 개인에게 부여되었으며 10년간 농지임대를 보장하고 계약된 생산물의 40%까지 개인보유를 허용하였다. 이처럼 정부의 생산장려 정책과 양호한 기후에 힘입어 89년의 식량생산은 사상 유례 없는 대풍작을 이루었으며 당시 베트남은 약 40만톤의 미곡수출을 달성하여 세계 3위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그 결과 1986년의 경제성장률은 3%이하였으나 1990년에는 6%까지 상승되었다. 1987년부터 91년까지의 기간 동안 주목할 만한 특징은 민간부문이 최고 25%까지 성장했다는 점이다. 민간부문의 성장은 1990년에 민간기업법 통과를 계기로 가속화되었다.
한편 1980년대 후반 동구와 소련시장의 붕괴 이후로 베트남의 국제무역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1986년 이전까지 베트남의 무역은 사회주의권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규모도 연간 10억 달러를 넘지 않았지만 1987년이래로 교역상대국이 다양화되었고, 수출액도 이후 급속하게 증대되었다. 또한 1987년에는 1977년의 법을 대체하는 외국인투자법이 제정되어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투자지역이 되었다. 즉, 87년의 투자법은 합작기업에 대한 2년간의 세금유예, 특정 수출입품목에 대한 세금면제, 합작투자기업의 비국유화보장 등을 명시했으며, 모든 부문에 대한 기업활동이 허용되고 외국은행의 설립도 허용되었다. 외국인투자법의 제정은 이전까지 원조의 형태로 도입되던 외국자본을 투자프로젝트형식으로 유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부터는 100% 외국소유프로젝트를 허용하였다 .
투자유치를 위한 이와같은 정부의 노력은 80년대 후반부터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91년까지 거의 9억달러가 증대되었다. 1990년 581.6백만달러였던 외국투자는 1991년 1,234백만달러로 두 배 이상 증대되었다. 선도적인 외국투자의 재원은 한국, 대만과 홍콩이었으며 그 밖에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주요 부분을 구성하였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의 베트남경제는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혼합시장경제였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은 시장경제원리를 도입해서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를 혁신시켰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율이 하락하고 식량생산 증대가 이루어졌으며 외국자본이 유치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2년 이후 - 개혁 가속화
1991년 6월의 제7차 당대회에서도 개혁노선은 재확인되어 개혁의 방향은 시장경제로 정해졌다. 1991년 6%였던 경제성장률은 1992년을 계기로 8%대에 들어서 1994년에는 8.8%를 기록하였다. 또한 1992년의 개정헌법은 지난 80년 헌법과 달리 시장원리의 도입에 따라 국영부문, 집단부문과 함께 민간부문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또한 1994년 2월에는 미국의 경제제재조치가 풀리면서 통상관계가 다양화되었으며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변화는 1995년 7월 아세안(ASEAN)의 일곱 번째 회원국이 되어 역내무역을 보다 활성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최근 10여년간 연 7% 이상의 성장을 지속해 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의 고성장 국가가 되었다. 게다가 지난 2006년 WTO의 정회원이 됨으로써 도약에 도약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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