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한영민

kimswed 2009.07.03 15:56 조회 수 : 1269 추천:381



광대는 무덤을 남기지 않는다.


이 글의 제목으로 쓴 “광대는 무덤을 남기지 않는다” 라는 말은 얼마 전 현정권의 문화부 장관인 유인촌씨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광대라고 표현하며 인용한 글입니다. 무덤을 남기는 것 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로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을 다 소진한다는 뜻이라고 해석을 달았습니다.
늦은 저녁, 밀려드는 졸음에 반쯤 잠긴 눈으로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이 글을 만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잠에 밀려 반쯤 감긴 뇌가 벌떡 기상을 합니다. 광대가 무덤을 남긴다는 말 자체의 의미는 해석이 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튼 진정한 삶의 자세를 일러주는 귀한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이 칼럼을 통해 저명인사들이 남긴 비문을 훑어보며 그들의 삶의 흔적을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버나드 쇼의 비문 “우물쭈물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문구는 수많은 업적을 남긴 그의 삶을 볼 때 의외의 문장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만 아직도 못다한 삶의 미련을 남긴 듯하여 그리 큰 감명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대는 무덤을 남기지 않는다는 이 글귀는 우리에게 삶의 자세를 일러주는 간략하고도 명확한 지표처럼 보였습니다. 무엇을 남길 것을 염려하지 않는 삶. 자신의 역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소진하여 재마저 태워버린 그런 삶이야 말로 인간이 찾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자는 나이 50을 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내린 삶의 목적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이세상을 한 50년 정도 살다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깨닫는 다는 말인데, 과연 그렇게 자각하는 삶의 의미란 진정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회의적인 답변이 주를 이룹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삶의 목적이 있을까요? 신에게서 부여 받은 목적 말입니다. 물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간단하게 규명됩니다. 즉 자손을 넓게 퍼트려 인간이라는 종자를 번성케 하기 위한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목적, 형이상학적인 삶의 의미, 나만의 존재를 위해 마련된 삶의 가치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이 주장입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현대인의 삶을 시지프의 형벌과 비유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삶은 높은 산에 바위를 올리고, 그 무게로 자연히 굴러 떨어진 바위를 다시 또 산 정상으로 올리는 무가치한 노동을 반복하는 시지프의 형벌과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작을 기록한 성경에도 신은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였지만 자손을 번성하라는 말 외에는 아무런 명이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의 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빈 도화지와 같은 삶의 캠퍼스에 자유의지라는 물감으로 스스로의 삶을 그려가야 합니다.
마치 아무 지시로 받지 않고 근무를 시작하는 신입사원과 같은 처지가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 이제 그 신입사원이 실적을 올리고 임원으로 성장하던지 아니면 그냥 맥 놓고 앉아서 자리만 채울 것인지는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뽑아 놓았으면 뭔가 일할 것을 주어야 할 회사는 그저 자리만을 제공할 뿐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는 부조리한 상황이 바로 인간이 삶입니다.

이렇게, 생겨났으나 존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주어지지 않은 부조리한 삶의 광장에 내던져진 인간이, 생의 시간을 넘긴 사후에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욕심은 무가치한 시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품어야 하는 욕심은 사후의 남겨진 공적이 아니라 사는 동안 행하는 행위자체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생의 시간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고 사후의 시간은 인간의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무덤에 세울 비문을 어찌 적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그저 주어진 삶, 그 무거운 돌덩이를 산 정상에 올리는 무가치한 노동 속에서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가라고 합니다. 무덤을 만드는 것 조차 이미 사라진 삶을 미화하는 과다한 포장일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책이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나라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소각하겠다는 삶의 철학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사후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시신에 침을 뱉는다 해도 개의치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는 결코 노벨상 수상자로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정책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운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는 개인마다 달라질 수 있으나 험난한 역사의 파고를 넘으며 그가 스스로 만들어간 그만의 삶의 가치는 결코 폄하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조선일보에 <이규태 칼럼>이라는 일일 칼럼을 20년 동안 6000여 회나 쓰고 돌아가신 이규태 선생의 경우에서 우리는 소진한 삶을 발견합니다. 이규태 선생은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 칼럼을 쓰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눕듯이 운명했습니다. 그는 마치 42킬로를 달려 아테네에 승리를 알리고 숨을 거둔 인류 최초의 마라토너처럼 자신의 삶을 모조리 소진하고 난 후 미련 없이 생을 마감했습니다. 2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신문, 같은 지면에 비슷한 성격의 글을 쓰다가 운명한 그의 삶은 보는 각도에 따라 시지프의 형벌처럼 무의미하게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무가치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권태로운 일상의 반복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갔습니다.

스스로 위대해지기를 원하는 삶은 위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이루고 남기고자 하는 삶은 결코 진정한 삶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이란 재마저 타버린 흔적 없는 공(空)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광대의 모습에서 그런 진정한 삶의 자세를 발견합니다. 광대는 결코 남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어 남에게 기쁨을 선사합니다. 광대는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광대는 단지 역할로 남을 뿐입니다.
삶의 역할을 대변하는 광대가 무덤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광대는 존재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짙은 화장 속에 감춰진 광대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지 않지만 많은 이에게 웃음을 주고 어린이에게 꿈을 선사한 광대의 우스광스런 몸짓은 잊지 못합니다. 광대는 슬프나 기쁘나 광대입니다. 광대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영원히 숨쉬는 광대에게는 죽어서 들어갈 무덤이 필요치 않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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