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는 이유
우리 사무실에 필리핀 사람들, 정말 ‘대단쓰’가 아닐 수 없다는 걸 매일 실감한다. ‘대단쓰’, 대단하다는 내가 만든 말이다. 물론 내가 만든 말이니까 나만 쓴다. 그래도 듣는 사람들은 뭔 소린지 다들 안다. 말이란 게 원래 이런 게 아닐까 한다. 대충 어디서 들어본 것 같고 어감 비슷하면 뜻이 통하는 것, 그래서 신조어란 게 매일 생겨나고 외계어가 웹사이트에서 튀어나와 실생활에 까지 통용되는 게 아닐까 한다.
필리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때는 이들이 거침 없이 말하는 영어 발음이 몽땅 다 필리핀 고유 토속어인 ‘따갈로그’ 발음이라는 걸 실감할 때이다. 매번, ‘어떻게 저런 발음을 하면서도 영어를 저렇게 유창하게 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영어는 어디에서 배웠냐고 물으면 모두들 그냥 “학교에서”라고 아주 쉽게 답해준다. 필리핀 사람들이 영어를 잘해도 모두 잘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고등 교육을 받은, 정식으로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이 영어를 잘해도 잘한다.
해외에서 근무하다 보니 우리 나라 사람 중에도 영어 꽤나 한다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나본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된장 발음에 한 박자 쉬어가는 영어가 대부분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미국이나 영국 같은 영어권 국가에서와 같은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만나 보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정도 영어 실력을 갖췄다면 이런 모래밭과 돌산 사이를 오가며 일을 해야 하는 곳은 꺼리겠지만, 내가 만나 본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자칭 타칭 영어 잘한다는 사람들 치고 대부분이 ‘콩글리시’ 수준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천재적이라고 까지 생각되었을 정도로, 영어 단어 100개 정도 수준에서 전치사도 시제 변화도 하나 없는, 그야 말로 단어와 단어의 나열 정도 만으로도 현지 종업원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고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날아온 해외 바이어와 거침 없는 대화를 나누던 어느 회사 공장장이었다. 이 분은 그런 출중한 영어실력 덕분인지 그 당시 베트남에서 4년을 지내는 중이라 하면서도 베트남어는 단 한마디도 배울 생각도 않는 눈치였다.
반면에 베트남에 정착하려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베트남어를 습득하려고 노력한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베트남 땅에 발이 닿자 마자 그 즉시 현지인 애인을 만들어 밤낮으로 베트남어로 대화를 주고 받고, 그러다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나중에는 거의 베트남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게 되어도 베트남어를 베트남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질 못했다. 상대하는 사람마다 구사하는 용어와 대화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간과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아무리 베트남 생활을 오래했어도 베트남어를 배우려는 열성과 노력이 부족했다는 결말이다. 물론 베트남 아닌 다른 나라, 다른 언어를 접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이 영어를 한국 사람 보다 쉽게 익히는 비결이 항상 궁금하던 차에 우연찮게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언어학자도 아니고 언어학에는 별로 아는 게 없으므로 그냥 그럴 것 같다는 내 생각일 뿐이다. 한 번은 아랍어 교재를 구하려고 백방 노력 중에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영어와 필리핀어가 병기되어 있는 아랍어 교재를 발견했다. 필리핀어는 모르지만 영어가 같이 표기 되어 있으므로 쉽지는 않아도 아랍어 입문서 정도는 되겠거니 해서 잠시 들여다 보던 중에 ‘따갈로그’라는 말의 속성에 대해서 어렴풋이 개념이 잡히기 시작했다.
‘따갈로그’ 말 속에는 영어에서 왔음직한 단어도 있었고, 스페인어로 보이는 단어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따갈로그’도 ‘크레올Creole’의 한 갈래라는 이야기다. ‘크레올’이란 옛 날 17, 18세기에 한창 유럽의 발명과 발견의 시기에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던 사람들, 다른 안목으로는 침략자들이었던 유럽인들과 세계 각처 - 주로 도서島嶼(섬) 지방 토속민들 사이에서 생겨난 혼혈인들과 그들의 언어를 이야기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해서 생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따갈로그’의 정체를 캐묻던 도중 재미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필리핀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느 지방에서 왔냐에 따라서 사용하는 같은 ‘따갈로그’ 말이지만 의미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다가도 ‘이런 단어는 이런 뜻이다’ 라고 마치 예전 7~80년대 컴퓨터 언어 프로그래밍 하듯이 대화 전에, 또는 대화 도중에 사전 선언을 해준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내가 만들어낸 ‘대단쓰’라는 자가조어(自家造語)처럼 필리핀의 국어인 ‘따갈로그’ 역시 생겨난 지가 얼마 안된, 지금도 변화를 거듭하는 성장 도중에 있는 언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아낸 필리핀 사람들이 우리 보다 쉽게 영어를 습득하는 비결이 아닌가 한다. 즉, 필리핀의 ‘따갈로그’는 조상 중 한 쪽이 유럽어이므로 유럽어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리말과는 달리 영어에 근접해 있는 언어이고, 그런 언어환경에 있는 필리핀 사람들이 비록 ‘따갈로그’식 발음이지만 우리 보다 영어가 유창한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대졸자라면 거의 모두가 어느 정도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자국에서 보다 높은 보수를 얻기 위해서 자기 나라를 떠나서 생활한다. 자국어에 영어에 아랍어에 ‘만다린’(북경어, 중국 표준어)까지 구사한다는 그네들에게 “내가 보기엔 당신네들 모두 천재인데 나라는 왜 그 모양으로 그렇게 가난하냐?’라는 물음에 “부정부패가 너무 심해서”라는 판에 박힌 답이 돌아오지만, 우리 나라도 부정부패라면 지금도 그다지 깨끗한 나라가 아니기에 그 답은 정답이 아닌 거 같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필리핀 사람들처럼 쉽게 영어를 익혀 너도 나도 해외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도 지금쯤 필리핀과 다름 없는 나라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비전문가의 사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이므로 반대 의견이 있다거나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전문적인 분야에서 오랜 세월 연구 끝에 알아낸 것이 아니므로 모든 반론에 겸허할 것이며 진실 앞에 숙연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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