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지난 밤 잠을 뒤척이다 위스키 한잔을 약처럼 삼키고 잤는데, 아무런 장식하나 없는 침실의 하얀 벽 아래 멀끔히 앉아있는 작은 노란 시계가 6시를 가리킬 때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위스키 한잔에 맛이 간 것은 아니고 덕분에 수면을 잘 취했다는 얘기다. 이제 일어나 회사 가야지 하다가 문득 오늘이 토요일임을 깨닫고 한걸음 뒤로 마음을 보낸다. 옅은 수면에 다시 잠긴다. 그리고 시침이 8시를 가리킬 때 노란 시계의 유리가 평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제 밤에 만들어 놓아 이미 서늘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다시 통째로 커피 머신에 부어 거른다. 다시 뜨거운 커피가 되어 내려오면 지글대는 소리를 낸다. 이렇게 재생된 거피를 고동색과 흰색 줄무늬가 어우러진 커다란 머그컵에 한잔 가득 부어 들고 작은 베란다에 나선다.
요즘은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아침 공기가 차다. 왜 베트남 아파트의 베란다는 이렇게 작을까? 작은 베란다에는 그만큼이나 작은 티 테이블 의자가 하나 놓여있다. 베트남 사람들 체형에 맞춘 의자라 그런지 도무지 등이 편치 못하다. 불편한 의자라는 생각을 내내 하면서도 그저 쿠션 하나를 등에 대고 불편함을 그대로 참고 지낸다. 마치 오토바이 뒤 자리에 유리를 들고 앉아 불안한 자세로 이동하는 베트남사람들의 인내를 배우는 듯하다.
그래도 이 자리에 앉으면 흔치 않은 아침의 찬 공기도 맞이하고, 부지런한 이웃 베트남 사람들의 움직임도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또, 밤에만 드러내는 수줍은 별들도 만날 수 있다. 이방인의 연민을 깨우는 저 멀리 공항 끝자락에서 깜박대는 비행기의 불빛도 볼 수 있어 좋다. 나름대로 속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은 공간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오랜만에 드러난 푸른 하늘에 간간히 떠가는 구름 속으로 별 의미도 의지도 없는 너절한 사념들이 흩어진다.
손에 들린 커피는 어느새 뜨거운 김을 삭이고, 저 아래 보이는 양철 지붕 위를 덮던 긴 그늘이 조금씩 짧아진다. 시계 초침이 지나가듯 빠르게 지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토요일 오후 골프약속이 있다는 생각에 게으른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가니 휴대폰 전화 벨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 K 사장이 아파트로 찾아와 함께 골프장에 가기로 한 약속 때문에 오는 전화라는 것을 느낀다. “한영민입니다” 하는 의례적인 인사에 K 사장은 정색을 하며 묻는다. “웬일이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알고 보니 K 사장은 내가 베란다에서 생각 없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무려 13번이나 전화를 한 것이다. 잘 시간도 아니고 나갈 시간도 아닌데 전화를 안 받으니 불안해서 계속 전화를 한 것이란다.
그런데 왜 13번일까? 엉뚱한 의문이 스친다.
그러고 보니 커피 한잔을 들고 그 불편하고 좁은 베란다 의자에 앉아 무려 2시간을 보낸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시간 동안 내 귀에 들리지 않았던 다른 전화를 보니 노인 연합회 C 회장님이다. 그제서야 어제 노인회관 개관식 참석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래도 회사 직원이 잊지 않고 꽃다발이라도 보낸 모양이다. 참석도 못해 미안한 인간에게 꽃다발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송구한 인사다. 참석하지 못함을 사과 드리고 전화를 끊었지만 한숨이 절로 샌다. 요즘 이런 일이 태반이다. 약속을 잊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적을 정도다.
도대체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 단기 기억장치에 뭔가 고장이 생긴 모양이다. 몇 번이고 되뇌지 않으면 그 약속의 존재 자체가 머리 속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사라진 기억은 약속한 사람을 우연히 마주 한다고 해도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이미 뇌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완전한 망각의 세계를 맛보는 것이다. 나이 탓일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최백호의 노래처럼 실연조차 달콤할 수 있는, 제법 그럴듯한 만추(晩秋)의 여유를 가질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정작 그 시간이 되니 세상이 점점 멀어져 간다. 시간이 너무 빨리 달려 나만 낙오자로 남겨두고 저만치 달려가는 듯하다. 다시 들메끈(신발을 매는 끈)을 고쳐 매야 하는데.
TV의 인간극장에 아프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잔잔히 흐른다. 아려진 가슴을 씻듯이 눈물이 오른다. 요즘은 눈물이 너무 흔하다. 눈물샘의 기능이 부실해졌는지 조금만 감정을 자극하는 장면만 스쳐도 바로 반응한다.
어느 로칼 음식점, 조그만 베트남 소녀가 밝은 표정으로 손님 사이를 부지런히 드나들며 음식을 나른다. 몇 살이나 됐을까? 15세, 이번에 화가 난다. 15세 소녀, 예쁜 가방을 매고 학교에서 꿈을 심어야 할 나이인데, 울컥 가슴이 채인다. “됐다 그만 해라, 저런 애들 이곳에선 천지거든” 친구의 핀잔에 다시 현실이 다가선다. 하긴 그렇구나. 그리 슬픈 일은 아닌가 보다. 저리 밝은 미소를 가진 소녀가 슬플 리가 없다. 그래도 편치 않은 마음이 앙금으로 남는다.
나이가 들면 감정이 깊어져 쉽게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맞이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시 변덕 심한 소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왜 이런가? 마감의 끝이 보이는 듯하여 그런가? 더 이상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가? 괴테는 나이 80이 넘어 <파우스트>를 탈고했다고 하던데, 그대는 벌써 끝나가려나.
하긴 부활절 축제날에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의 고뇌도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섭렵했지만 정작 재산도 돈도 명예도 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떠날 채비를 해야 하는 처지가 서러워 ‘즐기기에는 너무 늙었고 욕망을 잊기에는 너무 젊은’ 자신의 영혼을 팔아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물론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에서 방황하지만 그는 심판마저 두려워 않고 못 이룬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주저 없이 영혼을 내던진다.
욕망을 잊기에 충분한 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욕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처는 인간의 삶이란 고통이고 그 고통은 욕망을 실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버리지 못해 얻는 것이라 했다. 우둔한 인간은 아무리 얘기해도 알아듣지 않을 소리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욕망은 영원히 지고 가야 할 숙명일 수 밖에 없다. 세월이 빨리 감이 서러운 것은 이런 욕망을 채울 기회가 적어짐을 아쉬워하는 것 아닌가?
그래, 이국의 하늘에서 젊음을 다 보내고, 초라하게 구겨진 낯빛으로 그저 지나는 바람에도 맥없이 흔들리고 마는, 갈 곳도 올 곳도 모르는 인간이 느끼는 소회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면 세상이 불공평한 것이지.
젠장, 남자의 갱년기는 이렇게 시작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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