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한영민1

kimswed 2010.02.14 14:35 조회 수 : 1168 추천:352



약속이란 누군가와 특정한 일을 어떻게 하겠다고 정해두는 것을 말한다.
사회를 구성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약속은 필연적이다. 내일 누구를 언제 어디서 만난다는 기본적인 약속부터 파뿌리처럼 흰머리가 되도록 변치 않고 사랑하겠다는 평생을 건 성혼의 약속까지 살아있는 한 쉴새 없이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약속이다. 이렇게 약속이란 우리 삶에서 싫든 좋은 필연적으로 따라다닐 수 밖에 없는 행위다 보니 쉽게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오늘은 약속에 담긴 얘기를 풀어보자.

아마도 베트남에 웬만큼 사신 경험이 계신 분이라면 다 아시는 일일 것이다. 결혼 축하연은 통상적으로 한 시간 정도 늦게 시작하는 것이 예의고 남녀가 만날 때에는 여자가 30분 정도 늦게 나오는 것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다. 거래처와의 약속도 1시간쯤은 통고도 없이 늦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예전에 한국의 코리안 타임은 저리 가라다.  
이러다 보니 사회의 공동의 약속인 사회질서에도 적잖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교통 질서다. 정말 최소한의 약속만 수행되는 곳이다. 특히 오토바이의 경우 거의 질서에 대한 약속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자유 분방하다. 아무데나 가로질러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길이 좀 막히면 인도도 도로가 되고 역 주행도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교통에 관한 약속을 개인끼리의 시간 약속만큼이나 대충 지키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 셈이다.

교통질서가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약속인 것과 같이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집단에서는 어느 곳이던지, 의식하든 아니든 간에 상호간의 약속을 정하고 그것을 법제화하여 그 수행에 강제력을 부여한다. 그것을 우리는 규정, 정관 또는 법이라 부른다.

이런 법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한 약속이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따른다. 그런데 이런 법률들의 공통점은 단 한가지 수시로 바뀐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의 구성이나 사람들의 사고 방식, 관념, 시대적 가치관이 변함에 따라 법률은 수시로 보완을 하며 그 시대를 따라가게 되어있다. 제정된 이후 한번도 수정되지 않은 법안이 있는가?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되었다는 미국은 각주마다 개별적인 시행 법령을 지니고 있는데 코네티컷주의 하트포드에선 일요일에 키스를 해서는 안 된다는 황당한 조례가 있다. 이 조례는 연인은 물론이고 배우자에게도 해당된다고 한다. 알라바마 모밀에서는 여성들이 굽이 4센치 이상 되는 구두를 허락 없이 신을 수 없다는 법률이 있는가 하면, 미네소타주 알렉산드리아 시 조례에는 남성이 마늘이나 양파 정어리를 먹고 섹스를 해서는 안되고 (여성은 되나?), 워싱턴 주에서는 어떤 경우도 처녀와 성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한다.

이렇게 사회가 바뀜에 따라 예전에 엄격했던 법이 지금 와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마련이다. 즉 세상은 아무것도 예외 없이, 남김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상호 인정해야만 할 기본 조건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변화다. 상황의 변화, 마음의 변화 등등 세상의 모든 것은 살아있는 동안 변한다는 것이 진리다.
이렇게 사회의 공동 약속인 법도 변화하는데 왜 개인의 약속이 한결같아야 한다고 믿는가?

약속을 못 지키는 사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이 변해서 못 지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제는 그렇게 다시 만나고 싶어서 약속을 했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니 외출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별로 다시 만나서 할 일도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적당한 변명을 대서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마음의 변화에 따른 약속의 파기는 사실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물건을 사고도 마음이 변하면 일정기간 내에는 환불이 되는 거래약정이 일반화되지 않는가? 물론 지킬 마음이 없이 상대를 기만하고자 하는 의도로 약속을 했다면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하지만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변화에 대하여 좀더 떳떳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흔히 빠지는 함정 중에 하나가 바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변화에 대한 부정이다.
결혼을 굳게 약속한 연인이 있다. 그런데 어느 한 쪽에서 다른 이를 만났다 또 사랑에 빠졌다. 전 연인은 나와의 사랑의 약속은 어디 갔느냐고,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느냐고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아 부친다. 그러면 변화한 사람은 죄인이 되고 만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 사실 난 변화가 있었어 당신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변화가 생겼다고 말함으로 스스로 죄인의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지난 주에 돈을 빌려주겠다고 해놓고 왜 지금 와서 못 빌려 주느냐고 약속을 지키라고 밀어 부치는 사람도 있다. “응 그때는 자금 사정이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달라졌어” 하고 예의 있게 말하던가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자네에게 돈을 빌려주면 나중에 돌려받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하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물론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이러 저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당신의 여린 마음을 알고 있는 상대는 당신에게 가능한 많은 죄책감을 심어 자신의 의도대로 당신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약속의 함정이다. 그러니 공연히 어물대다가는 상대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꼼짝없이 신뢰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그의 요구대로 또 다른 약속을 정하는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 떳떳하게 말함으로 그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때는 그런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을 힘들어 하지 말자. 구차한 변명보다 솔직한 고백이 훨씬 믿음을 되살리게 만든다.

최근 한국에서는 행복도시 세종시에 관한 법률 개정 문제로 나라가 쑥밭처럼 어지럽다.
한쪽에서는 이대로는 안되니 더 좋은 방향으로 개정을 하자고 하고 한쪽에서는 국민과의 약속인데 번복해서는 안 된다며 원안을 사수하자는 결의를 돋우고 있다. 지난 번에 이런 약속을 하고 왜 지금 와서 다른 소리를 하느냐고 몰아 부치는 것이다. 그랬더니 수정하자는 쪽에서 대놓고 나온다. “그때는 표가 필요한 사정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니 국가 미래가 더욱 중요한 상황이라 이렇게 수정하자는 거다. 물론 표가 급해서 약속을 한 것이 잘못이다. 그러나 잘못된 약속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다” 라고 다 털어놓는다. 사실 전에 약속은 뻔히 못 지킬 줄 알면서 유권자를 기만한 것이다. 그런대도 터놓고 말하니 묘하게도 솔직해 보이는 변모가 드러난다. 하긴 어느 국민이 정치가의 공약을 그대로 믿겠는가? 아무튼 어떻게 판단할지는 국민의 몫이다.  
과연 누가 이길까?
어떤 쪽으로 가도 대놓고 변화를 털어놓는 쪽이 유리하지 않을까? 원안이 고수되어 뻔한 문제점이 들어나도 면책이 되고, 수정안이 통과되면 그 나름대로 성과를 인정받을 것이니 양수 겸장, 꽃놀이 패가 아닌가 싶다. 누가 함정을 파놓은 것인지, 누가 딜레마에 빠진 것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 정치가의 술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긴 예전에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한 말이 있다. “가끔 내가 한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자신도 믿지 않는 약속을 남이 믿고 있으니 놀랄 수 밖에.
정치인의 약속은 그 정도의 가치만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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