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하나의 무대이며, 남녀 모두는 한낱 배우에 불과하죠. 등장하는가 하면 퇴장도 하며, 생전에 여러 가지 역할을 맡는데, 일생은 7막으로 나눌 수 있죠. 1막은 아기 역, 유모 품에 안겨 침을 흘리며 보채는 역이죠. 다음 역은 심술쟁이 학동…그 다음엔 애인 역…그 다음엔 군인 역…다음 역은 법관…막이 바뀌어 6막이 되면, 슬리퍼를 신은 수척한 광대 노인…(그리고) 별스럽게 파란이 많은 이 인생사의 종막(7막)은 제2의 유년기, 오직 망각이 있을 뿐…세상만사가 허무죠”(윌리엄 세익스피어, “뜻대로 하세요” 2막 7장)
삶에 대한 세익스피어의 이해는 늘 비극적이었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비극적 결말로 귀결되는 이유는 시간에 대한 그의 이해로부터 기인하는 것 같다. 극의 주인공인 제이퀴즈의 대사를 통해서 세익스피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생의 역할을 바뀌다가 결국 허무한 삶의 종결로 이어지고 만다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단지 존재의 소멸과 무의미로만 흘러간다는 이런 허무주의적 견해를 액면 그대로 수용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목적적인 존재로서 희망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관념이 인생무상의 본체일 뿐이라면 무엇으로 궁극적 희망을 희구할 수 있겠는가?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실존적 현존재(Da-sein)로서 우리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극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삶과 죽음이라는 하나의 단위 속에서 시간속의 존재라는 부조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결코 삶의 지점(point)에서 죽음의 지점(point)까지 이어진 하나의 단위에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존적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
김기덕 감독은 그의 아홉 번째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 세익스피어의 허무주의를 넘어서고자 노력했다. 감독은 사람의 일생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겪는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4계절에 비유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묘사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이 끝나는 일생의 단위와는 달리 4계절은 언제나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시간 개념이다. 인간의 역사도 그처럼 한 사람의 일생이 다음 세대로 연속해서 순환하기 때문에 적어도 객관적 존재인 세계는 멈추지 않는다. 일 년이라는 하나의 시간 단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흐르다가 다시 봄이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간의 순환은 끝도 없이 반복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차의 바퀴처럼 순환을 통해 어떤 궁극적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인가? 시간에 대한 인류문화사적 성찰을 통해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은 리듬이다
우리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적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 시간(time)은 사실 물리적 실체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관념이다. 사전적 정의대로 말한다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인식될 수 있는 질서 잡힌 인과적 순서를 가진 관념”인 것이다. 이 말은 시간이란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관념에 존재하는 것이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간에 대해 너무나도 분명한 인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가 부여한 관념 체계가 삶의 질서를 유지해 주고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이 가능한 이유는 시간의 리듬이 많은 물리적 현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과 자연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종의 질서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자연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리듬을 지나치지 않고, 그 리듬을 이용해 삶의 체계를 세웠다. 시간은 바로 그런 체계를 반영해주는 대표적인 관념이었다. 자연은 주기적인 리듬을 따라 밤과 낮, 삯과 망, 파종과 결실, 태양의 주기적인 길이 등으로 반복되었고, 이러한 리듬의 변화는 하루, 한 달, 4계절, 일 년 등 시간의 관념으로 체계화되었다. 시간의 질서를 통제하는 시계와 달력 등은 모두 이러한 관념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장치들인 것이다. 한 마디로 시간 측정 도구라고 할 수 있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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