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에 베트남에서 정식으로 외국인 투자허가를 받고 사업을 시작했으니 만 20년이 지났다. 과거의 한 시점이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스레 느낀다. 그러니 인생무상을 자주 느끼려면 과거의 일을 자주 돌아보고, 미래의 계획이나 장래의 꿈에 대한 기대를 안고 살고 싶다면 자주 미래의 시점에 대한 상상을 해보시라. 시간도 생각보다 빨리 가지도 않아 조금함도 사라지고 생활 자체가 진취적으로 변한다.
요즘 세상에는 맨토를 찾는 것이 사회생활을 위한 스팩쯤으로 여기고 어디 좋은 멘토가 없을까 하며 두리번대는 모양인데 사실 멘토는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서로의 사정과 속마음마저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멘토를 구한다 해도 기대만큼의 결과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사실 엄청 좋은 말들이 주인도 없이 허공을 떠다닌다. 그런 말들이 실행이 불가능하거나 용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되씹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처음 20년 전 베트남에 왔을 때는 정말 갑갑한 심정이었다.
무엇보다 일에 대한 관념이 우리와는 다른 베트남 일반 직종의 직원들에게 일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확인시켜줄 것인지 정말 대책이 없었다. 이들에게 일에 대한 가치관을 새롭게 심어주려고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지만 남의 문화를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가치를 정하는 사회 시스템이 우리나라와 다른 곳에서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인 양 일방적 설교를 해댔으니 그 조직이 잘 돌아갈 리가 없다.
당시 자수공장 직원 100여 명을 3개조로 나누어 팀장을 정하고 관리를 시켰는데, 어느 날 한 팀장과 일반 생산직원이 함께 들어와 건의를 한다. 요지인즉, 팀장이나 생산직 직원이나 하는 일은 같은데 왜 월급이 차이가 나느냐고 따지러 온 것이다.
참 까무러칠 노릇이다. 업무에 따른 책임 그리고 그에 따른 보수가 다르다는 것이 자연스런 자본주의 경제의 원칙인데 사회주의에 물들어 있다가 자본주의 경제를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이해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리 뛰어난 관리인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현장에서 뛰는 직원들과의 사회적 환경이 다르면 그 능력을 발휘하기는 힘든 일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멘토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한 훌륭한 위인이라 해도 가치와 철학이 다른 환경에서 생활을 해온 사람이라면 그의 어떤 조언도 멘토의 말씀으로 전달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좌충우돌을 하며 베트남을 하나씩 배워가던 시절이 벌서 20년이 지난 것이다. 아무튼 그 후로는 그들에게 일에 대한 내 철학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십 년을 살아온 곳에서 이런 저런 후회가 없을 수 없겠지만 특히 부끄러운 사실은 베트남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일상적인 대화나 하며 아직도 대충 살고 있으니 참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언젠가 베트남 진출 초기에 나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주던 선생을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는 베트남 어가 도무지 늘지 않고 맨날 이 모양이다” 라며 푸념 비슷한 소리를 내뱉었더니 이 친구하는 소리, “미스터 한, 미스터 한이 언제 베트남어를 심각하게 공부한 적이 있어요?” 하고 묻는다. 돌아보니 그렇다.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지만 특히 베트남어는 참으로 건성건성 배우고 버리곤 했던 것 같다. 단어장을 만든 적도 없고 아무리 간단한 책이라도 한 권을 다 본 교습서가 없다. 그러니 그 친구가 볼 때는 공부는 안 하는 녀석이 바라는 건 많구먼 하는 것이다. 베트남어, 이곳 생활의 툴이다. 정서적인 공감대가 있다 하더라도 현지어를 익힌 사람과 아닌 사람이 이해하는 베트남은 각각 다르다. 정보를 수집할 때 정보자의 베트남어 실력을 가름해보는 것도 정보의 신뢰도를 파악하는데 절대적은 아니라 해도 도움은 될 것이다.
그런데 10만 여명이나 살고 있는 베트남의 교민들 중에서 언어로 인한 불편함 때문에 생활을 못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 그런가? 언어보다 더 정겨운 정서적 공감대가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잘 안 통하고 의사 소통이 부족해도 서로 얼굴을 보고 미소만 짓는 것으로도 은근한 친근감을 서로 느끼는 것이 바로 한국인과 베트남인이다.
어찌 보면 베트남은 한국인이 유일하게 환영 받는 나라이다. 어느 나라에서 한국인을 이렇게 대접하며 친근감을 보이는 나라가 있던가?
그렇다, 베트남은 우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나라다.
만약 국가가 결혼을 한다면 한국은 베트남과의 국혼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베트남의 경우, 비행시간으로 5시간 정도로 떨어져 있어 그리 멀다는 기분이 안 들고, 또 지나치게 가깝게 있지 않아서 근접한 관계로 인한 직접적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인적 자원이나 지하자원도 많고 무엇보다 국민이 젊은 곳이라 가용노동인력이 70%나 된다는 놀라운 잠재력을 지닌 나라이기에 우리와 인연을 각별하게 맺는다면 양국이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절묘한 국가적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세계 6대륙을 다 다녀봤다는 것이 그나마 나이가 들어서 내세우는 것의 전부이지만, 덕분에 다녀본 50여개 국의 어느 나라에서도 베트남과 같이 역사적, 정서적, 철학적 국민성이 우리와 유사한 나라는 본 적이 없다. 그런 유사점만을 살핀다면 두 나라가 과연 다른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사랑스런 베트남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스런 나라라고 할지라도 고국을 떠나 20년을 넘도록 지내다 보니 자주 보지 못하는 가족도 그립고 한국의 산하도 자꾸 눈에 밟힌다.
한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베트남 생활이 길었던 만큼이나 떠나온 고향에서 놓친 부분이 크게 드러나곤 한다.
먼저 한국의 인간관계가 무너져버렸다. 20년 가까이 외국에서 지내다 보니 한국의 지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한국에 가서도 다시 연락하여 만나보기가 어색해져 벼렸다.
그저 죽마고우 몇 명을 만나곤 하지만 이들 역시 이제는 나이가 차 올라 그런지 이곳 저곳 고장이 나며 몸이 별로 좋지 않아 그나마 만나기도 쉽지 않다.
둘째로 한국에서의 직업을 잃어버렸다. 베트남에 온 지 수년 만에 한국의 IMF가 터지면서 한국의 사업은 단 하루 만에 매출이 제로로 떨어졌다. 그전에 베트남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노숙자가 될 뻔 한 것이다. 베트남이 내 삶의 피난처 노릇을 한 셈이다. 그리곤 베트남 생활에 밀려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아예 구상조차 못했는데, 이제와 돌아갈 곳이 어디더라 하며 바라보니, 고향의 곡간은 텅 비어있고, 맛깔 나는 햅쌀대신 메아리처럼 울리는 써늘한 바람이 가슴을 파고 든다.
요즘 세상에는 맨토를 찾는 것이 사회생활을 위한 스팩쯤으로 여기고 어디 좋은 멘토가 없을까 하며 두리번대는 모양인데 사실 멘토는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서로의 사정과 속마음마저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멘토를 구한다 해도 기대만큼의 결과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사실 엄청 좋은 말들이 주인도 없이 허공을 떠다닌다. 그런 말들이 실행이 불가능하거나 용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되씹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처음 20년 전 베트남에 왔을 때는 정말 갑갑한 심정이었다.
무엇보다 일에 대한 관념이 우리와는 다른 베트남 일반 직종의 직원들에게 일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확인시켜줄 것인지 정말 대책이 없었다. 이들에게 일에 대한 가치관을 새롭게 심어주려고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지만 남의 문화를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가치를 정하는 사회 시스템이 우리나라와 다른 곳에서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인 양 일방적 설교를 해댔으니 그 조직이 잘 돌아갈 리가 없다.
당시 자수공장 직원 100여 명을 3개조로 나누어 팀장을 정하고 관리를 시켰는데, 어느 날 한 팀장과 일반 생산직원이 함께 들어와 건의를 한다. 요지인즉, 팀장이나 생산직 직원이나 하는 일은 같은데 왜 월급이 차이가 나느냐고 따지러 온 것이다.
참 까무러칠 노릇이다. 업무에 따른 책임 그리고 그에 따른 보수가 다르다는 것이 자연스런 자본주의 경제의 원칙인데 사회주의에 물들어 있다가 자본주의 경제를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이해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리 뛰어난 관리인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현장에서 뛰는 직원들과의 사회적 환경이 다르면 그 능력을 발휘하기는 힘든 일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멘토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한 훌륭한 위인이라 해도 가치와 철학이 다른 환경에서 생활을 해온 사람이라면 그의 어떤 조언도 멘토의 말씀으로 전달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좌충우돌을 하며 베트남을 하나씩 배워가던 시절이 벌서 20년이 지난 것이다. 아무튼 그 후로는 그들에게 일에 대한 내 철학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십 년을 살아온 곳에서 이런 저런 후회가 없을 수 없겠지만 특히 부끄러운 사실은 베트남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일상적인 대화나 하며 아직도 대충 살고 있으니 참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언젠가 베트남 진출 초기에 나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주던 선생을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는 베트남 어가 도무지 늘지 않고 맨날 이 모양이다” 라며 푸념 비슷한 소리를 내뱉었더니 이 친구하는 소리, “미스터 한, 미스터 한이 언제 베트남어를 심각하게 공부한 적이 있어요?” 하고 묻는다. 돌아보니 그렇다.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지만 특히 베트남어는 참으로 건성건성 배우고 버리곤 했던 것 같다. 단어장을 만든 적도 없고 아무리 간단한 책이라도 한 권을 다 본 교습서가 없다. 그러니 그 친구가 볼 때는 공부는 안 하는 녀석이 바라는 건 많구먼 하는 것이다. 베트남어, 이곳 생활의 툴이다. 정서적인 공감대가 있다 하더라도 현지어를 익힌 사람과 아닌 사람이 이해하는 베트남은 각각 다르다. 정보를 수집할 때 정보자의 베트남어 실력을 가름해보는 것도 정보의 신뢰도를 파악하는데 절대적은 아니라 해도 도움은 될 것이다.
그런데 10만 여명이나 살고 있는 베트남의 교민들 중에서 언어로 인한 불편함 때문에 생활을 못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 그런가? 언어보다 더 정겨운 정서적 공감대가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잘 안 통하고 의사 소통이 부족해도 서로 얼굴을 보고 미소만 짓는 것으로도 은근한 친근감을 서로 느끼는 것이 바로 한국인과 베트남인이다.
어찌 보면 베트남은 한국인이 유일하게 환영 받는 나라이다. 어느 나라에서 한국인을 이렇게 대접하며 친근감을 보이는 나라가 있던가?
그렇다, 베트남은 우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나라다.
만약 국가가 결혼을 한다면 한국은 베트남과의 국혼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베트남의 경우, 비행시간으로 5시간 정도로 떨어져 있어 그리 멀다는 기분이 안 들고, 또 지나치게 가깝게 있지 않아서 근접한 관계로 인한 직접적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인적 자원이나 지하자원도 많고 무엇보다 국민이 젊은 곳이라 가용노동인력이 70%나 된다는 놀라운 잠재력을 지닌 나라이기에 우리와 인연을 각별하게 맺는다면 양국이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절묘한 국가적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세계 6대륙을 다 다녀봤다는 것이 그나마 나이가 들어서 내세우는 것의 전부이지만, 덕분에 다녀본 50여개 국의 어느 나라에서도 베트남과 같이 역사적, 정서적, 철학적 국민성이 우리와 유사한 나라는 본 적이 없다. 그런 유사점만을 살핀다면 두 나라가 과연 다른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사랑스런 베트남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스런 나라라고 할지라도 고국을 떠나 20년을 넘도록 지내다 보니 자주 보지 못하는 가족도 그립고 한국의 산하도 자꾸 눈에 밟힌다.
한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베트남 생활이 길었던 만큼이나 떠나온 고향에서 놓친 부분이 크게 드러나곤 한다.
먼저 한국의 인간관계가 무너져버렸다. 20년 가까이 외국에서 지내다 보니 한국의 지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한국에 가서도 다시 연락하여 만나보기가 어색해져 벼렸다.
그저 죽마고우 몇 명을 만나곤 하지만 이들 역시 이제는 나이가 차 올라 그런지 이곳 저곳 고장이 나며 몸이 별로 좋지 않아 그나마 만나기도 쉽지 않다.
둘째로 한국에서의 직업을 잃어버렸다. 베트남에 온 지 수년 만에 한국의 IMF가 터지면서 한국의 사업은 단 하루 만에 매출이 제로로 떨어졌다. 그전에 베트남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노숙자가 될 뻔 한 것이다. 베트남이 내 삶의 피난처 노릇을 한 셈이다. 그리곤 베트남 생활에 밀려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아예 구상조차 못했는데, 이제와 돌아갈 곳이 어디더라 하며 바라보니, 고향의 곡간은 텅 비어있고, 맛깔 나는 햅쌀대신 메아리처럼 울리는 써늘한 바람이 가슴을 파고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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