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캄보디아 는 너무 노골적이고 우호적
전통적으로 북한과 캄보디아의 으호관계는 아주 돈독하다. 시아누크국왕이 민주진영보다 공산진영에 더 가까웠고 과거 자유주의자에서 중립주의자 공산주의 협력자로 변신하였으므로 자유진양보담 공산진영에 더 가가운 외교를 펼쳤으며 그가 현재도 외유를 한다면 북경이나 평양이고작이다.
특히 시아누크는 평양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김일성이 살았을때에는 의형지간을 맺어 아주 친밀하게 지냈으며 반면 평양에는 시아누크가 항상 거쳐할수있는 집이 마련되어있다.
2003년 캄보디아 총선거가 끝나고 정국이 경색되어 풀리지 않을때인 9월4일에는 국왕이 느닷없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는데 “자기는 국왕자리를을 은퇴하고 평양의 자기집에서 살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으며 그뜻을 이루려고 하는지 2004년 4월에 평양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을때에 일부에선 스스로 망명길에 올랐다고 하기도 했다.
실제로 시아누크는 평양에 아주 호화스런 집을가지고있다. 그의 집은 김일이 살아생전 지어주었는데 호수의가운데에 있으며 모터보트를 탈 수 있고 아름답고 넓게 생긴정원을 산책하기도 좋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또한 그를 돕는 개인 심부름꾼은 아주친절하고 음식도 아주 맛있으며 일본과 홍콩으로부터 좋은영화를 공급받아 관람할 수 있어 아주 즐겁다고 하면서 김일성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않았다고한다<글 출처 1980년대 미국기자>
1994년 김일성이 죽자 당시 캄보디아제일총리였던 라나리드<국왕의 장남이자 국회의장이자 친공산주의파>는 프놈펜의 마오쩌통<모택동>거리의 뚤꼭사거리의 일부구간을 김일성거리로 지정하여 현재까지 김일성대원수거리 라는 간판이 버젓이 길가에 있다.
현재 캄보디아 왕궁경호원은 북한의 현역병들이며 매년 40명식 교대로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북한기업이나 다른용도로 여기와있는 북한인은 없다. 특히 베트남하노이에서 거주하는 북한정보원인지 스파이인줄은 몰라도 친근하게 접근하는 000씨는 만나서는 안될인물이며 교민들도 그사람하고 친구라고 은연중에 자랑까지 하는데 요주의인물이니 가까이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프놈펜과 시엠립에 에 두군데 식당을 열고있어 이들관계자가 가끔씩 당면이나 다시다를 사러 한국인운영 슈퍼에 들르는것을 종종 목격할수있다.
특히 요번 비행기추락사고때 캄보디아나호텔 영안실에 허태식이<자칭태권도7단>조화까지들고 들고오기도하고.......
화해무드인지 같은뿌리라서그런지 몰라도 ?......
시아누크행적
Norodom Sihanouk 사직 공고는 수수께끼 캄보디아인이 놀람에 의해 그의 국가를 붙잡을 첫번째로 이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개인 병력은 계속 그의 국가의 저것 처럼 거의 사납다.
를 위한 캄보디아 정치의 최전선에 반세기 - Khmer 루주의 월남 전쟁 그리고 살벌한 년을 통해 - Sihanouk만 반복적으로 역행된 다른 정권 그리고 그의 long-suffering 사람들에게서 미친듯이 기뻐하는 환영에 돌려보내기 위하여 국가에서 망명되, 이었다.
지난 몇달간 동안, 81 년 오래된 이전 군주는, 캄보디아 정치가의 끝없는 접근전에 의하여 frustrated 자진 망명에서, 명백하게 다시 해외로 이었다.
지금 약하고 그리고 아프다, Sihanouk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의 다량을 잃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꽃줄을 그들의 임금의 그림을 가진 그들의 거리 그리고 집 계속하는 그의 사람들의 지원을 잃지 않았다.
눈부신 지도자
Norodom Sihanouk는 임금의 Norodom Suramarit 아들로 1922년 10월31일 에 Phnom Penh에서, 태어났다.
캠보디아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밑에 그 때 있고, 그의 기득권 Monivong를 성공하기 위하여 Sihanouk가 18 살 그를 관을 씌우도록 결정될 프랑스인 임금 일 때, 틴에이저를 상상하는 것은 고분고분한 통치자일 것입니다.
나는 명백하게 상관없이 사태 전환 왕위에 돌려보내는 것을 사절한다
Norodom Sihanouk 1955년
그들은 빨리 틀리게 입증되었다. 새로운 임금은 빨리 1953년에 프랑스에서 가득 차있는 독립을 이기기 위하여 계속해 민족주의 지도자가 되었다.
나중에 2 년, Sihanouk는 군주로 점거하는 상태에서 그의 아버지가 정치 경력을, 추구하기 위하여 퇴위했다.
Sihanouk는 빨리 그의 호사스러운 생활양식을 위해 유명하게 되었다.
창피를 모르는 숙녀의 남자, 그는 마지막으로 그의 여섯 번째 아내 Monique, 그가 1952년에 결혼한 이탈리아 캄보디아인과와 체재하는 것을 선택했다.
3개의 언어 - Khmer, 프랑스어와 영어에서 유창한 - 그는 상류 사회를 위한 맛을 개발해, 아마추어 film-making에서 물을 튀기고, 재즈 악단을 지도하고 잡지를 편집한.
그러나 그는 또한 비판 또는 불찬성을 관대히 다룰 수 없던 독재자로 돌았다.
외교 문제에 있는 처음에 중립국, 그는 캄보디아인이 월남 전쟁에서 죽ㄴ 1965년에 미국을 가진 외교 관계를 끊었다.
Sihanouk는 비극이 때문에 "미국 제국주의" 일어났다는 것을 BBC에게 당시에 말했다.
1970년에 러시아에 있는 외국 지정에, Sihanouk가 캠보디아로 넘어서 유출되는 미국 사람과 북쪽 베트남 힘 사이에서 싸우는으로 갑작스럽 망명되는 동안.
1m 이상 사람들은 Khmer 루주 규칙의 밑에 죽었다
Lon Nol 국무총리는 점거하고, Sihanouk는 그가 점락된 공산주의자 Khmer 루주 - 유류 남비에 나중에 그의 이름을 바꾼, Saloth Sar에 의해 지도된 매우 모택동주의자 그룹에 게릴라 운동을 결성한 중국에 있는 망명으로 강제적이었다.
점점 장악하기 위하여 시작된 Khmer 루주 캠보디아의 북에 있는 영토의, 및 Sihanouk는 1973년에 "해방한 지역"에 있는 반역자의 그룹과 사진이 찍힌 자세를 취하는 조차이었다.
그러나 그는 Khmer 루주를 가진 그의 협정을 후회할 빨리 것이었다.
그들은 1975년에 Lon Nol를 추방하고, 귀착된 백만인 보다는 더 많은 것의 죽음 대량 학살 정권을 창조하는 캠보디아의 전부 통제권을 얻었다.
Sihanouk는 국가 원수 국가 그리고 기술적으로 남아 있던으로 허용되고, 그러나 Phnom Penh에 있는 왕궁에 있는 가택 구류의 밑에 Khmer 루주의 4 년 규칙의 대다수를 썼다.
임금 조차 몰살 동안에 비극을 도주하지 않았다: 그의 14명의 아이들의 5개는 유류 남비의 가혹한 정권의 피해자로 죽었다.
1979형의, Sihanouk에 베트남 침입해서 그리고 설치해 그들의 자신의 괴뢰 정부이라고 다시 망명에서 다시 찾아낼 때.
그는 Hun 상원 의원이 지도한 베트남 역행된 정부에 대하여 royalists 나란히 싸운 Khmer 루주를 가진 다른 불안한 연합을 형성했다.
왕위에 반환
frustrated 교섭의 년 후에, 유엔 중개된 평화 거래는 1991년에 마지막으로 동의했다.
캠보디아에 돌려보내진 Sihanouk는 그는 규칙 아닙니다 재위하고 싶었다는 것을 그의 역할이 크게 상징적 남아 있고, 그가 말했더라도, 나중에 재 관을 씌운 임금이고.
Sihanouk의 아들 Ranariddh는 지금 저명한 정치가이다
1993년에 총선거에서는, Sihanouk의 아들 황태자가 Norodom Ranariddh 이끌리는 royalist Funcinpec 당은 - - 대부분의 좌석을 이겼다.
그러나 힘과 지배하는 공동체정신을 양도하기 위하여 사절된 훈족 상원 의원은 그와 황태자 Ranariddh 사이에서 동의했다. 연속적인 년에서는 2 남자는 쓴 경쟁자로 캠보디아의 정치의 최전선에, 수시로 남아 있었다.
Sihanouk는 이물장식으로 그의 역할 대로 크게 최근에는 그가 끝없는 정치적인 논쟁에 의하여 점점 frustrated 되더라도, 행했다.
그는 중국과 그가 숨기는 지도자와 동료 필름 담황색의 연한 가죽 김정일의 친구인 북한에서 그의 시간의 다량을, 해외로 소요했다.
그의 사람들은 불시의 일격, 전쟁, 정권 변화를 통하여 그에게 진실하게 체재하고 기근 - 실물대 몰살 조차 - 그는 그들의 다르게 사나운 생활에 있는 1개의 안정되어 있는 영향이고.
Norodom Sihanouk's abdication announcement is not the first time the enigmatic Cambodian has caught his nation by surprise.
In fact his personal history has been almost as turbulent as that of his country.
At the forefront of Cambodian politics for half a century - through the Vietnam war and the bloody years of the Khmer Rouge - Sihanouk was repeatedly backed different regimes and been exiled from the country, only to return to a rapturous welcome from his long-suffering people.
For the last few months, the 81-year-old former monarch has been abroad again, in self-imposed exile, apparently frustrated by the interminable infighting of Cambodian politicians.
Now frail and ill, Sihanouk may have lost much of his political clout, but he has not lost the support of his people, who continue to festoon their streets and houses with pictures of their king.
Flamboyant leader
Norodom Sihanouk was born in Phnom Penh on 31 October 1922, as the son of King Norodom Suramarit.
Cambodia was then under French colonial rule, and when Sihanouk was 18 the French decided to crown him king to succeed his grandfather Monivong, imagining the teenager would be a compliant ruler.
I categorically refuse to return to the throne no matter what the turn of events
Norodom Sihanouk, 1955
They were soon proved wrong. The new king quickly became a nationalist leader, going on to win full independence from France in 1953.
Two years later, Sihanouk abdicated to pursue a political career, with his father taking over as monarch.
Sihanouk soon became well-known for his extravagant lifestyle.
An unashamed ladies' man, he finally chose to stay with his sixth wife Monique, an Italian-Cambodian he married in 1952.
Fluent in three languages - Khmer, French and English - he developed a taste for the high life, dabbling in amateur film-making, leading a jazz band and editing magazines.
But he also turned into an autocrat, who could not tolerate criticism or dissent.
Initially neutral in foreign affairs, he brok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United States in 1965 when Cambodians were killed in the Vietnam war.
Sihanouk told the BBC at the time that the tragedy happened "because of US imperialism".
While on a foreign assignment in Russia in 1970, Sihanouk was abruptly exiled as the fighting between American and North Vietnamese forces spilled over into Cambodia.
More than 1m people died under Khmer Rouge rule
Prime Minister Lon Nol took over, and Sihanouk was forced into exile in China, where he formed a guerrilla movement allied to the communist Khmer Rouge - an ultra-Maoist group led by Saloth Sar, who later changed his name to Pol Pot.
The Khmer Rouge started to take control of more and more territory in the north of Cambodia, and Sihanouk was even photographed posing with a group of rebels in the "liberated zone" in 1973.
But he was soon to regret his pact with the Khmer Rouge.
They drove out Lon Nol in 1975, and gained control of the whole of Cambodia, creating a genocidal regime that resulted in the deaths of more than a million people.
Sihanouk was allowed back into the country and technically remained head of state, but spent the majority of the Khmer Rouge's four-year rule under house arrest in the royal palace in Phnom Penh.
Even the king did not escape tragedy during the genocide: five of his 14 children died as victims of Pol Pot's harsh regime.
When the Vietnamese invaded and installed their own puppet government in 1979, Sihanouk again found himself again in exile.
He formed another uneasy coalition with the Khmer Rouge, who fought alongside the royalists against a Vietnam-backed government led by Hun Sen.
Return to the throne
After years of frustrated negotiations, a UN-brokered peace deal was finally agreed in 1991.
Sihanouk returned to Cambodia and was later re-crowned king, although his role remained largely symbolic, and he said he wanted to reign not rule.
Sihanouk's son Ranariddh is now a prominent politician
In the general election in 1993, the royalist Funcinpec Party - headed by Sihanouk's son Prince Norodom Ranariddh - won the most seats.
But Hun Sen refused to cede power and a ruling partnership was agreed between him and Prince Ranariddh. In subsequent years the two men have remained at the forefront of Cambodia's politics, often as bitter rivals.
Sihanouk largely stuck to his role as figurehead, although in recent years he has become increasingly frustrated by the endless political wrangling.
He has spent much of his time abroad, in China and North Korea, where he is a friend of the secretive leader and fellow film buff Kim Jong-il.
His people have stayed true to him throughout coups, wars, regime changes and famine - even a full-scale genocide - and he has been the one stable influence in their otherwise turbulent lives.
**캄보디아의우월성
여사적으로 인도차이나에서 가장문화민족은 아마 캄보디아라고 단정지을수있다.
다만 불행히도 캄보디아엔 고대역사기록이 없으며 중국문헌에 의존 기록된것이 매우 아쉬울뿐이다. 건국신화에서보면 인도에서 건너온 카운디나가 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기록돼있으며 역사이전부터 인도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였고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에서 유래된 언어를 가지고있기도 하였다.
고대 앙코르제국시절엔 타이의 치앙마이 말레이시아반도 라오스 베트남가지 지배를 하였기에 타이와 라오스와는 종교적으로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있다. 같은 테라바다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크메르의 지배를 받았기에 정령숭배사상이나 제례행사에서는 유사한점이 많다.
캄보디아의 새해인 4월14일 설날풍습이나 음력8월 조상신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행사나 각가정에 모시고있는 정령을 위한신당도 비슷한 형태이다.
언어면에서도 타이 라오스는 비슷한것이 많다. 이는 과거 캄보디아가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나 필리어에서 타일랜드와 라오스글자가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랜 중국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고유가 글자가 없다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난후
프랑스가 로마자를 응용하여 글자를 만들어 주었다. 이처럼 문화적인 차이도 많았기에 동일화를 시도하고있는 베트남사람들에겐 캄보디아 사람들로선 쉽게 마음을 열수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또 다른하나는 베트남의 남부지방 즉 호치민시를 중심으로 남부 비옥한 농경지가 과거 캄보디아의 국토였기에 이에 대한 감정도 복잡하다.
지금은 호치민시라고 부르고 있지만 1975년이전에는 사이공 그리고 17세기에는 프레이노코 라는 캄보디아의 한촌락에 불과했단다.
캄보디아국토면적은 181,000평방Km로 한반도보담 약간적은편입니다.그러나 국토의쓰임새가 양호하여 평야는 전국토의 절반정도이며 나머지는 산림과 호수로 채워져 있는데 산림자원은 거의 원시림으로 구성되어있다.
주로 국경지역인 라오스와 타이는 거의가 산악지대이며 베트남국경지역인 북쪽에 산악지방 남족엔 평야로 구성되어있다.
특히 프놈펜의 서북족에서부터 타이와의국경지역에는 천연의 밀림이 아직도 존재하고있으며 이곳엔 호랑이도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에서 가장높은산은 캄퐁츠낭에 위치한 오랄산<Phnum Aoral>dmfhtj 해발 1,810m에 달한다.
**종족
카모디아에살고있는 종족위 95%는 크메르족이며 여사적으로 관찰하면 크메르인들은 머리가 곱슬머리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이곳사람들은 곱습머리가 아니거나 반곱슬머리가 많이있다. 그리고 베트남 국경지역엔 라타나가리와 몬돌끼리, 타이와의국경지역엔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있으며 참족이나 중국으ㅣ 한족 대략 27종 정도로 알려져있습니다. 참족은 주로 이슬람교를 신봉하기에 Cham Muslims이라고 부르며 특히 프놈펜에서 캄퐁츠낭으로 향하는 5번국도의 길목엔 많은 무슬림의 모스크가 눈에 띤다. 대략 50만명의 참족이 거주하고있다.
특히 베트남사람들도 약 200만명이 현재 캄보디아에 영구 거주하고있는데 이들 캄보디아사람들은 베트남사람들을 일컫어“유은<노예라는비속어>”이라고 브며 멸시하기도 한다.
특히 화교들이 주요상권을 거의장악하고있는데 화교의 특징상 현지인들하곤 결혼을 하지않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곳의 중국인들은 크메르족과 결혼하여 약 100만명정도가 거주하고있다.
캄보디아증시 2009년오픈
훈센총리는 “정부는 최근 증권시장개장을 위한 법 규정을 마무리하고있으며 2009년에는 증시가 문을 열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조치는 최근 급성장하고있는 각 산업분야의 지원을 위해 자본시장의 형성이 매우 중요한데 따른것”이라고 말했다.
IMF는 최근 캄보디아에서도 금융거래가 활성화돼 지난해만 40%의 성장을 기록하고있어 증권시장 설립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국가신용도 조사기관인 S&P는 지난4월 처음으로 캄보디아 국가신용도를 거래기능수단인 B+로 발표해 역시 캄보디아 자본시장의 가능성을 일깨워주었다.
캄보디아가 가난한 이유
1.기후가 따듯하다는것이다. 그래서 난방비나 혹은 두꺼운 옷이 필료없으며 옷이 없어도 별문제가 되질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만 하여도 옷을입지 않아도 되었다.
요즘은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옷들을 입고 있으나 실제로 동북부 산악지방인 “라타나끼리‘ 나“몬돌끼리‘ 에 가면 지금도 옷을입지않은 사람들을 자주 볼수있다.
이나라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전통치장인 “끄로마”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이나라 기온은 모든생물체가 살아가는데 가장좋은온도이다. 즉 연중 온도차이가 20C가 넘지않는다.
2.쌀이 풍부하다.
따뜻한기후와 풍부한 강우량때문에 쌀생산이 풍부하다. 실제로 이나라에 자생하는 야생벼의 경우 하루밤만에 약 8mm정도 자라는 것으로 되어있다.메콩강물이 범람하드래도 자기의 벼이삭을 물속에 잠그지 않기위함인데 그만큼 벼가 잘 자란다. 다만 관개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않아 우기때에만 벼를 재배할수있을뿐이다. 일년 3모작은 가능하나 건기철인 10월부터 3월까진 물이 말라 크지를 않거나 말라죽어버린다. 이나라엔 조그만 무는 생산이 가능하나 큰배추는 거의 베트남 남부 달랏지방의 고원지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수입에 의존하고있다. 이나라 쌀생산량은 국민들이 먹고살기엔 풍부하지만 이전엔 안남미라해서 60년대 수입한쌀 대부분이 베트남 남부 이곳 캄보디아 메콩강 줄기에서 생산되는 쌀이었기에 안남<중국사람들이 월남을 칭하기를 윌남아.원남,안남이라고 부름>미라 칭했다. 그래서 풍부한 쌀덕분에 구태여 아웅다옹하며 살필요성을 별로 느끼지않았으며 더불어 풍부한 과실이 생산되어 더운나라에서 굳이 일할 필요성까지 느끼지 않았고 <번역:아주 게으름> ,
지금도 습관이되어 그들은 당장 하루벌어 끼니만 때우는 방식의 진보없는 일생활의 연속선상에 살아가고 있다.
3.인구밀도면에서나 굳이 땅이 넓은데 경쟁심을 갖지않았고 그저 긍정적으로만 살아간다.
프놈펜을 위시하여 거의 대부분 평양지대에 몰려 살기 때문에 짐짓 인구밀도가 조밀하게 보여질지 모르지만 프놈펜인구밀도가 1Km2 당 76명이라면 시골 산악지방엔 45명에 불과한곳도 있다. 그곳의 토질도 비옥하지만 프놈펜을 중심으로 한인근 평야지대는 5천년 전까지만 해도 바다였다고한다.매년 메콩강 을 따라흘러메워진것이 거대한 삼각주가 아닌 이곳 캄보디아 땅이되었다.
그래서 이나라 사람들은 퇴비나 비료를 모르고 농사를 짓고 살아왔지만 프랑스 식민지시절 배운 못된 농약사용을 대도시 인근에 간간히<집단재배농가> 사용하고 있는실정이다.
그래서 이나라엔 메뚜기 노점상이 유달리 많다. 베트남에 메뚜기 장사가 거의보이지않은것은 결과적으로 과다한 농약사용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나라 사람들은 운명론을 믿기 때문에 내일을 준비할 생각을 하지않으며 심지어 죽음자체를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못된 종교의식 때문에 지금까진 더 이상의 진전이있는것이아니라 오히려 크메르제국의 <Kingdom of Cambodia>영광은 커녕 세계최대 빈국중의 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캄보디아는 변화되고있다 풍부한 메콩강 어족자원뿐 만아니라 성장발육에 가장 적당한 습도와 온도에 잘 자라는 고무나무<전략농산물> , 그리고 2009년부터 본격 생산에 돌입하는 석유, 배워야산다는 서구문화의 급속도 전이 확산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있다.
다만 다변화되는 가운데서도 첮째 국민들의 진전없는 종교의식<불교+이슬람교+힌두교+샤마니즘....>을 고취시키지않으면 항상 밝은미래만을 기대할순 없다고 사료된다.
여느가정 집집마다 신당인지 제사상인지 이름모를 신이지도 모르지만 의례 제작된 조그만 신주단지가 없는집이 없다.
그래서 우리 사무실을 찾는 많은 외국인들이나 한국사람들이 제발 좀 치워달라고 사정하지만.......
치워놓으면 다시 대문입구 제자리에 도루 가져다놓고 향불피우고 컵에 물도따라주고 촛불도키고 기도도 하고 ....우리네 한국인 정서로선 다소 이해하기어려운 민습도 있다.
오래전 수도 프놈펜은 아시아의 어느 도시보다도 아름답고 유명했었으나, 캄보디아 내전 때문에 모든 기반시설이 파괴되었다. 현재 프놈펜은 다시 아름다운 도시가 되기 위하여 개발계획(마스타 플랜)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옛 시가지를 보존하는 것 이외에, 짜똘목 강 주변의 5개지역을 개발하는 계획이다. 즉, 1. 뽕뻬이 호수 개발계획, 2. 콕펙 개발계획, 3. 일본다리 건너의 좌측 쁘레익리엡, 4. 벙스나오 개발계획, 5. 추가하여 르세이께오의 프렉프나오(Vicinity Tom nub Kom s개v)개발계획이다.
4개지역의 개발계획은 이미 투자되었으며, 학교, 상가, 상업센타, 스포츠센타 및 고층빌딩이 포함된 기반시설이 건축되도록 계획된다. 이 5개 지역의 개발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프놈펜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될것으로 기대된다.
프놈펜 부시장 H.E. Mann Chhoeun 에 따르면, 프놈펜시가 인구증가 통제와 시 개발에 관하여 최우수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며, 프놈펜시는 2개의 개발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프놈펜시 5개 지역 개발계획이고, 다른 하나는 50% + 50%(프놈펜시 50%, 민간자본 50%로 도로 건설)계획이라고 하였다.
훈센 총리에 따르면 프놈펜의 도로를 정비하고 건설하는 50% + 50% 계획 달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정부가 3백만 달러 이상을 지원했으며, 프놈펜시와 관련 장관부서는 현재까지 이 계획을 준비하고, 계속 지원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프놈펜시가 세계개발도시의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5개 지역 개발계획프놈펜시 관리에 의하면, 프놈펜시는 프놈펜시 주변에 5곳을 개발하는 계획을 결정하였다. 이 계획에 의하면, 이들 중 4곳은 캄보디아투자회사와, 외국투자회사에 의해 투자된다.
즉, 1. 봉뻬이 호수 개발은 캄보디아와 한국회사, 2. 콕펙(다이아몬드섬) 개발은 캄보디아 회사, 3. 일본다리 건너 동쪽인 쁘레악리읍 시장 왼쪽지역은 말레지아와 한국회사, 4. Nirod Pagoda 정면에 위치한 봉스나오(스나오 호수)개발은 캄보디아 회사가 투자한다.
1. 봉뻬이 호수 개발 계획캄보디아 정부는 봉뻬이 호수를 개발하기 위하여 2,063백만 달러에 달하는 개발계획을 결정하였다. 이 계획은 캄보디아회사와 한국회사가 협력하며, 119헥타 규모로 캄보디아 투자자본 51% 한국투자자본 49%로 투자한다. 이 계획은 6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13년이 소요된다.
2. 콕펙(다이아몬드 섬) 개발 계획콕펙 섬은 왕궁 앞 짜토목 강에 위치하며, 현재 이 섬은 최근 10년 동안 홍수에도 과거처럼 침수되지 않는 섬이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캄보디아 투자회사가 많은 돈을 이 섬에 투자하며, 정부는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조건이 더 좋은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다. 이 섬은 90년 동안 PHAIMEX 투자회사가 임대 사용한다.
이 계획은 매립공사, 고층빌딩, 호텔, 리조트시설 등이 포함된다. 소문에 의하면 이 회사는 2개의 교량을 건설하는데, 하나는 훈센공원에서 강을 건너는 곳이며, 다른 하나는 차바 암포브에 위치한 삼퐁아뎃 파고다 정면에 건설된다.
3. 봉스나오 개발계획이 호수는 Nirod 절 앞의 1번 국도 남쪽지역에 위치하며, 개발에 많은 회사가 참여 하는데, 주요 회사로는 SOKIMEX, PHAIMEX 등을 볼 수 있다.
4. 일본다리 건너 동쪽 및 쁘레압리읍 시장 좌측지역 개발계획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말레지아 회사에 의해 투자되어 왔으나 현재까지 결과를 볼 수 없었다. 2006년 들어 썬웨이 회사의 투자요청을 받아 들여 1월에 훈센총리와 프놈펜시장 껩쭈떼마에 의해 공식발표 되어387헥터를 장기 임대하여 신도시개발 재 승인을 했다, 요즈음 프놈펜 시는 이 지역을 개발하려 할 때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하여 이 지역 근처에 다른 개인이나 회사가 어떤 매립공사와 건축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이 계획은 매립, 도로건설 등 여러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고 들었다.
또한 개발부지 387헥터가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150헥터를 한국회사가 개발하고 이어서 캄보디아회사의 170헥터, 이어서 캄보디아회사의 150헥터를 개발 중이며 일부부지는 분양 중에 있고 나머지 2~4개의 회사는 승인을 받기 위해 계획 중이거나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한다.
이 지역의 경우 전체 개발부지의 면적이 전체 약1,000헥터 이상에 이를 것으로 보이며 메콩강과 똘레삽 호수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야기될 수 있는 문제해결프놈펜 부시장은 이 지역 시민들의 가옥들이 좋은 조건을 가진 다른 장소를 찾기 위한 문제와 같이 개발계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의 해결에 대하여 언급했으며, 거주민들이 이 계획을 받아들이고 동의해 주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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