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역사

kimswed 2014.08.07 08:13 조회 수 : 2113 추천:123



베트남도 우리나라 만큼이나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온 역사의 나라로, 중국부터 몽골군, 그리고 프랑스, 미국 등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침략이 계속되어왔다. 이같은 외세의 침략으로 베트남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나 도탄에 빠진 나라와 민족을 구한 베트남 국민들의 영웅이 바로 리트응끼엣, 쩐흥다오, 윙후에, 보윙얍 등 아래 네 장군들이다. 이들 4인은 비록 출신지도 활약했던 시대도 달랐지만 자신의 안위를 뒤로 하고 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나라와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리 트응 끼엣 중국 본토공략, 송나라황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리트응끼엣 장군은 크메르 왕조와 중국 송황조의 침략을 차례대로 물리쳐 베트남의 국민적 영웅이 된 인물이다. 리트응끼엣의 본명은 응오뚜언(Ngô Tuấn)으로 하노이 출신이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후 Lý 황제의 성을 사하 받아 Lý Thường Kiệt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베트남 남진 역사상 가장 공이 큰 인물로 남진을 통해 Trần, Hồ, Lê, Nguyễn 시대를 열어준 장본인이다.


1069년 당시 중국은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인 위기를 벗어날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다이비엣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리왕조를 공격하였다.
한편 이 시기, 리왕조의 왕좌에 겨우 10살짜리 아이가 오르면서 왕국의 모든 권력은 리 트응 끼엣 장군에게 주어졌는데, 그는 송나라의 침략을 맞이하여 베트남 최초로 ‘공격적인’ 방어전략을 취했다. 즉, 그는 1075년 당시 십만 군사로 구성된 두 무리의 병력을 중국으로 직접 투입했는데, 당시 왕안석의 개혁정책에 대해 중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들을 시기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중국 남부 지역에서 해방자로 통했다. 그 결과 리왕조의 군사들이 중국에 상륙하자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고, 리 장군은 이 상황을 이용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간 지 42일 만인 3월 1일 마침내 웅쩌우 Ung Châu(난닝 지역)를 점령한다. 한편 1077년 10만의 송나라의 군사들은 참파 동맹군과 함께 경계를 넘어서 뉴응우엣 강에서 리 장군의 군사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후 거친 싸움이 뒤따랐고 이때도 그는, “어떻게 그 야만인들이 감히 우리의 땅을 침범하려 하는가? 그들은 반드시 패퇴할 것이다!”라며 사기를 고무시키며 전군을 이끌고 진격해 송나라 대군 8만 명을 멸절시킴으로써 마침내 승리를 쟁취했다. 그 결과 리 장군은 까오방, 랑선 등 송나라 측과 5개의 전방지역들을 양도할 것을 포함하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리트응끼엣 장군은 이처럼 뛰어난 전략가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법을 아는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베트남 최초로 중국본토를 과감하게 공격함으로써 송나라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승리로 인하여 국가권력이 안정화되었으며 (200년간의 평화기 도래), 이후에 들어선 쩐 왕조는 군사력을 더욱 강화시켜 두 세기 후에 닥치는 몽골의 공격에도 대항할 수 있었다.

쩐 흥 다오 – 베트남 제1의 영웅, 세계최강 원나라를 무찌르다!

리트응끼엣 사후 210년 만에 또다시 베트남 땅에 걸출한 인물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쩐흥다오다. 그는 남딘(Nam Định)성 출신, 본명은 쩐 꾸옥뚜언(Trần Quốc Tuấn)으로, 쩐(Trần) 왕조(1225~1400년)시대의 제일의 공신이자 장군이었다. 그는 특히 쩐(Trần) 태종의 손자로서 원나라가 남방으로의 팽창정책을 펼치면서 3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침략했을 당시 백성의 단결력에 호소해 원(元) 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1283년 당시 원 나라가 50만 대군으로 베트남을 공격해 1285년 초 당시 왕도인 탕롱(Thăng Long-현 하노이의 옛 이름)이 함락되자 당시 왕 인종(1273~1293년)은 전쟁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원에 항복할 것을 쩐흥다오장군에게 묻는다. 이때 그는, ‘왕이시여, 항복하시려면 제 목을 먼저 베십시오’라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 마침내 탕롱을 재탈환하고 원군을 물리쳤다.

한편 베트남과의 패전에 격노한 원세조는 1287년 재차 수륙 양군 30만 대군으로 제3차 베트남을 침략했으나, 쩐흥다오 장군은 하이퐁 근처 밧당(Bạch Đằng)강 전투에서 강바닥에 용치를 박고 만조 때 원의 전함을 유인, 간조 때 용치에 걸려 꼼짝 못 하는 원 수군은 물론, 도주해가는 원나라의 육군마저도 미리 매복시킨 복병을 통해 대파시켜 국가의 독립을 지켰다.

베트남 사가들은 쩐흥다오 장군이야말로 베트남 제1의 민족 영웅으로, 베트남을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항해 굴복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지킨 유일한 나라가 되게 한 걸출로 평가한다. 특히 베트남 해군은 오늘날에도 밧당(Bạch Đằng)강 전투를 기려 쩐흥다오 장군을 ‘베트남 해군의 아버지’로 기리고 있다.

윙 후에 – 청의 30만 대군을 하루만에 무찌르다!

윙후에는 유명한 꽝쭝 황제(Quang Trung Hoàng đế ;光中皇帝)의 이름이다. 그는 근대 베트남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의 영웅이자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백전백승의 용장이다.

윙후에의 생부는 원래 호(Hồ)씨 였고 응에 안 (Nghệ An) 사람으로 온 가족이 떠이 선(Tây Sơn)으로 잡혀 왔다. 당시 그는 7 남매(3남 4녀)의 막내로, 1771년이후 형제들이 당시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웬((Nguyễn)씨 일가의 전횡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여 권문세도가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뀌년(Quy Nhơn), 광응아이(Quảng Ngãi), 빈투언(Bình Thuận), 야딘(Gia Định)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또 다시 1782년에는 윙가의 가주 윙안(Nguyễn Anh-1802년 윙왕조를 세운 야롱 황제)이 이끄는 태국군 20,000여 명을 전멸시킨다. 이후 그는 또다시 북부지역의 찐(Trịnh)씨 세력을 점차 몰아내 1786년에는 그 지역 전체가 떠이선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한편 1788년 12월 21일 윙후에는 청군에 의해 푸쑤언(Phú Xuân)에서 탕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전달받고 스스로 꽝쭝 황제에 오른 뒤 100여 마리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강력하게 청군을 공격, 단 반나절 만에 30만 명을 궤멸시킨다. 당시 따이성 군이 야밤에 급습하자 청나라 군대는 “귀신부대가 쳐들어왔다”며 허겁지겁 달아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4년 만인 1792년에 39세를 일기로 병사하고, 얼마 못돼 그의 가족들은 1802년 윙왕조의 쟈롱황제에 의해 후에에서 참살당하고 만다.

베트남 사가들은, “꽝쭝 황제는 세계 최강 건륭제가 통치하는 청나라 군대와 맞서 스스로 황제라 자처함으로써 그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히려 월등한 군사전략과 여유로 단 하룻밤 만에 그들을 무찔러 다시는 베트남을 넘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1천 년 역사상 가장 통쾌한 전투요, 베트남전쟁사상 가장 위대한 투쟁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보 윙 얍 – 20세기 최고의 명장, 붉은 나폴레옹 세계최강 미군의 콧대를 누르다!

보윙얍 장군은 20세기 최고의 명장, 붉은 나폴레옹 등으로 불리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베트남 역사상으로도 베트남 독립운동사에서 호찌민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초창기 쇼팽을 좋아하고 프랑스 역사에 심취했던 사학도(역사 선생)로, 알렉산더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명장들의 병법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기자 출신으로 글을 잘 쓰고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39년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찌민을 중국에서 만난 후부터 무장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보윙얍 장군은 탁월한 지략가이자 타고난 용장으로, 그에게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전쟁터에 나가면서 몸에 ‘북에서 태어나 남에서 죽는다’는 문신을 새기고 전투에 임할 정도로 죽음을 불사했다. 본국에 돌아갈 날짜만 계산하고 있었던 미군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1954년 딩빙푸 전투에서 처음으로 서방 각국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당시 그는 3개월에 걸친 치밀한 준비로 압도적인 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군을 밀림 속에 숨겨 둔 105mm 곡사포를 사용해 55일만에 퇴각시켰다. 이 사건을 세계전쟁사가들은 “식민지 피지배계급의 게릴라전에서 시작해 정규군으로 무장, 유럽제국주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라고 높이 평가하곤 한다. 이 사건에 대해 그도, “이 시기 우리는 프랑스군과 베트남군을 정확히 알았지만 그들은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으며, 단지 우월한 무기만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1954~1975년 베트남전에서는 세계최강 미국을 상대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적이 원하는 시간, 좋아하는 장소,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3불 전략을 원용해 미군을 당혹게 했다. 특히 캄보디아 국경지대부터 10년간 120km에 이르는 지하터널을 3~4층으로 만들어 미군의 애를 먹였으며 결국 미국은 장기전을 포기하고 두 손 들고 만다.

한편 지난 2013년 10월 4일 사망할 당시 그의 장례식장에는 얍 장군을 흠모하여 찾아 온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등, 지금도 베트남인들은 그를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용장으로 추앙하고 있다.

베트남 사가들은 이에 대해 “베트남전은 2차대전 이후 최장기전이자 가장극렬한 전투였다. 이 기간에 미국은 총 6백만 명의 병사와 수천만 리터의 독성 화학 물질, 심지어 핵무기를 제외한 당시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대적인 무기들을 총동원했지만 결국 보윙얍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군 불굴의 정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고 그의 전술을 높이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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