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역사2

kimswed 2014.08.07 08:16 조회 수 : 1546 추천:116



딩빙푸(ĐIỆN BIÊN PHỦ) 전투이후 프랑스 군은 완전 철수하고 제네바(GENEVE) 협정에 의해 북 베트남이 통일된다. 다시 그로부터 2년 후 총선거가 실시되어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된다. 하지만 미국은 남 베트남에서의 침략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군사 경제 원조를 본격화한다. 이때부터 베트남 전민족(CẢ DÂN TỘC VN)은 미국에 대항하여 항전을 결심한다. 1954년부터 미국의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가 시작되었고, 수년 후 통킨만 사건이 발단되어 결국 1973년 파리협정을 통해 미국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근 20여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북 베트남 측과의 지루한 싸움이 이어진다.

당시 남 베트남에서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정권이었던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하지만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의 정권은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을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개발이 아닌, 사치품 수입으로 낭비된다. 심지어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킨다. 그 결과 국민들이 등을 돌리며 지엠 정권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9년말 동커이(Đồng Khởi;총궐기)운동이 일어나고 1960년 11월 20일에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이 결성되었는데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일부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에는 불교도들의 반정부 시위가 극심했는데, 이들의 시위를 경찰로는 감당못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팃광득 승려의 소신공양(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나고, 그로부터 1달 후인 1963년 11월, 미국의 방관 하에 쿠데타가 발발, 지엠은 동생과 함께 성당으로 숨으려다 체포되어 사살당한다. 하지만 정치공백에 권력의 맛을 본 군부의 야욕에 의해 북 베트남군에 항복하는 하루 전날까지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남 베트남의 상황은 평안한 날이 거의 없었다.

베트남 전쟁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발단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 (통킹만 해상에서 미국의 선제공격에 따라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 공격)이 발생하고, 미국은 이 사건에 없던 사실을 끼워넣고는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전쟁을 시작한다.이듬해인 1965년 3월 30일, 사이공의 미 대사관 폭파(218명 사상자 발생)가 결정적 계기가 전쟁발단이 되어 버린다.

연합군 결성과 미국의 참전

그 결과 1965년부터 베트남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전쟁 발생직전까지 티우 대통령은 “정규군 병력이 58만인데다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살아있고, 북 베트남도 북폭으로 초토화되었는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냐” 며 적을 얕보고 있었다. 전쟁은 미 공군의 1966년 6월 29일의 하노이, 하이퐁 유류저장고 폭격으로 크게 확산된다. 그 결과 7월 17일에 북 베트남은 전국민과 군대에 비상동원령을 선포했다. 중국은 각종 전쟁 물자와 무기 후방기지를 본격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하고, 8월에는 남 베트남 주둔 미군이 30여만명으로 늘어난다.

미군의 고전

당시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까닭에 상황이 곧 종료되리라 기대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이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쟁양상이었다.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속에서 고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 상급장교들은 사이공의 장교 클럽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헬기 조종사들은 맥주에 취해있었으며, 다른 장병들은 마약까지 손을 댔다. 심지어 종전이 다 되어가던 1972년에는 탈영자들, 무단이탈자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경제적 낭비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적을 잡기위해 투여된 탄환과 폭탄의 양은 천문학적인 액수였으나 실효성은 별로 없었다. 특히 투입된 전력의 ¾이 비전투병력 (요리사, 수선공 등)인데다 실제로 최일선에서 매일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전투병력 일부밖에 되지 않았다.

북베트남군의 탁월한 전략과 사기

한편 비엣민과 북베트남은 비밀리에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북베트남이 비엣민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호찌민 루트) 이들은 이 길을 통해 미군을 수시로 괴롭혔다.

구정공세

1968년, NVA(북베트남군)와 비엣민이 설 연휴 동안의 관습적 휴전을 이용해 공격을 하였다. 설 이전부터 미리 대규모로 병력을 잠입시켜 설 연휴에 남베트남 주요 대도시에 동시 다발적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고, 도리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만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 등이 공격당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미국에도 중계가 되었고, 미국민들은 심한 정신적 충격을 입고반전여론이 고조된다.

케산전투

1968년 1월에 벌어진 포위전투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사이의 국경에 인접한 요충지 케산에 주둔한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2,100명을 북 베트남 2개 사단이 포위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케산 공세는 미군에 그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목표였는데, 실제로 미국의 매스컴들은 베트남 군이 이제는 미군을 포위할
정도가 되었다며 공포를 드러내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미국에서는 반전운동이 한층 강화되어갔다.

전쟁의 종결과 남베트남의 멸망
끝없는 전쟁과 미국의 철수;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닉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고, 결국 1969년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다. 게다가 반전여론과 경제 인플레이션 및 재정적자로 인해 아시아에 주둔 미군을 대폭적으로 감축시키겠다는 요지의 “닉슨독트린”이 발표된다. 그 결과 미군의 철수는 6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결국 1973년에 북베트남과 미국은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완전 철수하게 된다.

남베트남의 항복

1975년 3월 초에야 티우 대통령은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재배치해서 좀 더 버텨보려고 시도했으나 이때를 틈타서 호찌민루트로 우회해서 진격한 북베트남군에 의해 이후 1, 2군단이 붕괴되고, 휴전선인 북위 17도 선과 중부 고원지대(Tây Nguyên ;1975. 3.24)와 후에(Thiên-Huế ;1975. 3.26)가 넘어가고 만다. 더군다나 이 와중에도 수도 사이공에서는 정쟁과 쿠데타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

남베트남의 정권교체와 베트남의 통일

결국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인 다낭(Đà Nẵng)이 함락(1975년 3월 29일), 남베트남군은 패하고 만다. 4월 21일에 티우 대통령이 사임하고, 그가 탈출한 이후인 4월 30일에는 결국 사이공까지 함락되면서 전쟁은 종결된다. 하지만 미국은 남베트남의 패망과 아비규환에 빠진 남베트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했다. 전쟁의 막바지에서 공산 베트남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4월 30일 새벽 5시, 마지막 헬기편으로 마틴 미대사를 포함한 2천여 명의 피난민이 마지막으로 탈출한다. 하지만 이 때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후 추가로 탈출한 사람들까지 합쳐 보트피플로 전락했다.

미국에 끼친 영향
한편 미국은 전쟁하느라 엄청난 돈을 부은 시기에 오일 쇼크,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쳐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겪으며 사회적으로는 염세주의와 고엽제 후유증과 마약의 확산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 고엽제들은 본래 목적과는 달리 베트남의 산림과 농업까지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이옥신등의 성분이 포함된 강력한 독성으로 전쟁에 참여 한 군인들이나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지금까지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베트남전쟁을 포함한 미국과의 항전은 베트남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베트남은 베트남역사상 가장 강력한 외부의 침략자(역대 최대 규모)들을 물리쳤다.
이 전쟁은 2차대전이후 최장기전이며 가장 극렬한 전투로, 이 기간 동안 미국에서는 다섯명의 대통령이 바뀌고 총 6백만 명의 병사, 7,850,000톤의 폭탄, 수천만리터의 독성 화학물질 투하, 심지어 핵무기를 제외한 당시 가장 현대적인 무기(총 3,520억 불)를 총동원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세계최강 미국이 베트남인들의 불굴의 정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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